젊었을 때 직장 다니면서 아이 하나 키우기도 힘에 겨웠다. 강아지 한 마리 있으면 아이의 정서적인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강아지 털이 신경 쓰여 키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후 오랜 세월 강아지는 내 삶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은퇴한 지금, 반려동물을 데려와 길들이면 식구 하나 는 것만큼 정이 들고 노부부만 남은 휑한 집안에 서로 의지거리가 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어쩌다 마음이 기운 적은 있지만, 난데없는 그녀의 제안은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내가 아는 한, 그녀의 강아지 사랑은 유별하고도 깊었다. 나의 어떤 점을 보고 자식만큼이나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를 주려고 했는지 몰라도, 그래서 나는 더 갈등했다. 강아지 얼굴을 생각하면 당장 데려오고 싶었다.
그러나 강아지를 보낸 순간부터 내게 쏟아질 그녀의 시선을 떠올리면 움츠러들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상대의 기대에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웃음을 기대하는 사람 앞에서 찌푸리기 어렵듯이, 그녀의 관심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무리하지 말고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살자고 다짐했는데, 그것도 지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들 며느리 눈치도 보였다. 손자는 봐주지 않으면서 아이 키우는 것만큼이나 손이 가는 강아지를 키운다면 서운해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결국 물러서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강아지를 식구로 맞는 일은 내 깜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표면적인 이유 외에, 드러나지 않은 다른 이유로 강아지를 외면하는지도 모른다. 사람과의 이별도 벅찬데 새로운 생명에 정을 붙여 이별을 아파하는 일을 새삼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또는, 자연스레 다가왔다가 헤어지는 가벼운 이별도 감당하기 어렵다는 그런 이유로….
대학 다닐 무렵이었으니 어린 나이도 아니었는데 그 사건은 충격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는데 겨우 눈이나 떴을까 싶은 새끼강아지가 마루에서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홀린 듯 쪼그려 앉아 잠든 강아지를 지켜보았다. 우리 집안에서 어림도 없던 일이 일어난 거였다.
그렇게 키우자고 성화를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엄마, 딸 넷 치다꺼리로도 하루해가 언제 저무는지 모른다는 엄마였다. 몸은 약해도 마음까지 말랑말랑한 엄마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런 엄마가 강아지를 들인 거였다. 강아지를 통해 모성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던 아린 기억. 표현하기 어려운 아릿함이 강아지를 만난 반가움을 앞섰으니 그때가 아마 철이 드는 무렵이었나 보다.
그렇게 강아지가 우리 집에 왔고 우리 식구가 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서로 차지하려고 옥신각신했으니 강아지는 한시도 우리 손끝을 벗어날 틈이 없었다. 품에 안았을 때 느껴지는 촉감으로 지은 이름이 몽실이였다. 몽실몽실한 이름은 부를수록 혀에 감기며 식구들 삶에 스며들었다. 이름대로 살게 되리라는 믿음이 강아지에게도 적용되는지 고것은 하루가 다르게 튼실하게 커갔다.
개 사료가 따로 있는 줄도 모르고 살던 우리는 새 식구에게 우리 밥과 반찬을 덜어주었다. 마당을 뛰어 놀며 제법 자라자 더는 집안에 둘 수가 없었다. 마당에 개집이 들어왔고 몽실이는 어엿한 집주인이 되었다. 동생과 같이 한 방을 쓰던 나는 내 방을 갖는 게 꿈이었다. 동생 눈치를 보며 이불 속에서 라디오 음악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을 때면 제 집을 가진 강아지가 그렇게 부러웠다.
대학 졸업 후, 시골 중학교로 발령받아 자취 생활을 했다. 내 방이 생긴 거였다. 출근하면 학생들이 있는 교실에서, 퇴근 후엔 내 방에서 풍선 같은 젊은 시간을 보내며 주말에만 집에 들르게 되면서 몽실이와도 차츰 거리가 생겼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대문 근처에만 가도 달려와 반기며 짖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집안에 감도는 적막감. 겁이 났다. 내가 들어서는 기척만 있어도 달려 나오던 엄마는 부엌에서 발이 붙은 것처럼 움직일 줄 몰랐고 식구들도 눈을 마주치려 하질 않았다.
내가 객지에서 허공에 떠서 지내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끌려가는 내내 가녀린 희망으로 원망스레 뒤돌아보았을 불안한 눈빛을 어찌하면 좋을지. 나는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일까.
그녀 집에 갔을 때 우리 몽실이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세련되고, 다 자라도록 앙증맞은 강아지가 뛰어오르며 나를 반겼다. 나는 습관처럼 강아지 눈을 들여다보다가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한 젖은 눈과 마주쳤다. 슬픔 가득하던 몽실이의 눈. 기억도 가물거릴 정도로 멀리 가 있는 시간인데 젖은 눈망울은 어찌 이리 선명할까. 마음을 접고서도 한동안 그녀의 하얀 강아지가 눈에 밟혀서 입양 제안을 안 들으니 만 못했다.
살아가며 때로 마음 아프고 슬프지 않기를 바랄 수야 없겠지만, 상처가 얼마나 깊으냐에 따라 저절로 낫지 않는 경우도 있다.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몽실이에 관한 글을 씀으로써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아픈 기억을 지우고 그 자리에 사랑스럽던 모습을 담으려는 내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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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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