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을 챙긴다. 점점 짐이 간소해진다는 생각을 한다. 일상에서의 반복은 리듬을 낳고 리듬을 타면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하다. 손가방 하나에 꼭 필요한 몇 가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물건만 넣는다. ‘있으면 좋을’ 것들이 아니라 ‘없으면 안 될’ 것만 추려 본다. 여행 가방뿐 아니라 생각도 삶도 그렇게 단순할 수 있다면….
마음에 밑그림을 그려 선과 색으로 세월을 채우며 간절히 꿈꾸던 여행. 미지의 세상을 호기심으로 하나씩 건드려 풀어가는 마법처럼, 여행은 할 때마다 새롭고 설렌다.
혼자 짊어지고 감당해야 할 고독이 두렵기는 해도 사색여행은 혼자여야 제 맛이라는 말에 구미가 당긴다. 스스로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때쯤, 어쩌면 한 번쯤은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을 계획할지 모르겠다.
흔히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한다. 생각해 보면, 여행을 계획할 때의 설렘이 인생 초기에 갖게 되는 세상을 향한 흥분 어린 기대와 비슷하다. 또한 인생의 황혼 무렵 지친 육신의 피로를 정신적 안식으로 달래는 점은, 여행 목적지에 이를 때쯤 숙소에 짐을 풀고 차 한 잔으로 여독을 푸는 일과 닮아있다. 여행도 인생도 저물녘이면 원초적 편안함을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는가.
‘인생의 종착지인 무덤에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로 인생을 평가하듯, 여행도 어떤 길을 택해 무엇을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며 다녔느냐에 가치를 두게 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여행은 풍요로워진다. 인생에서도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로 나머지 삶이 전혀 다르게 전개될 수 있듯이.
어떻게 여행을 해야 알차게 하는 것일까.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이면 도보여행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발품 팔며 구석구석 다니다 보면 일상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갖가지 보물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휙휙 달리는 창가에 기대어 바깥 풍경에 빠져드는 재미도 여행에서 빼놓기 어려운 매력이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큼직한 윤곽을 하나의 완성된 그림으로 받아들이며 생각과 마음의 폭을 키울 수 있는 기차나 자동차 여행을, 나는 그래서 좋아한다.
가끔씩 차를 세우고 침묵으로 호흡하며 가능하면 느린 걸음으로 자연의 크고 작은 신비를 즐기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이 어려운 나는, 걸으면서 보기보다는 멈추어 서서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야 오감을 동원해 자연을 느낄 수 있고, 우주 가득한 기(氣)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기분이 든다. 말벗과 글벗이 되어줄 누군가 곁에 있는 것도 좋겠지만,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한 동행이라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의 삶 보이지 않는 뒷면에는 더 빨리 더 많이 얻고 잃지는 말았으면 하는 욕심이, 조급함과 불안감 속에 자리 잡기 쉽다. 때문에 몰입 자체를 즐기는 여유가 쉽지 않고 열정 속에서도 만족감을 얻기가 어려운지 모른다. 이를 감안한다면 가끔씩 주어지는 여행이, 내려놓음과 느림의 미학을 맛보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걷다 쉬다 하여 마냥 더뎌진 걸음이라 해도, 해질녘에 편안히 몸을 눕혀 쉴 곳을 찾기만 하면 그만 아닐까. 노그라지는 몸과, 덩달아 적당히 피로해진 정신도 이완시킬 겸 길게 누웠을 때의 그 느긋함. 하루를 충실하게 보낸 육신은 한층 가라앉은 별무리를 바라보며, 가까이 멀리 들리는 풀벌레 소리에 안겨 평온한 잠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앞으로의 여정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리라는 다짐이 있기에, 다음 날을 걱정하지 않는 잠은 달고 깊다. 단잠으로 마무리되는 하루는 오늘에 대한 완벽한 마침표보다는 쉼표로 남겨두는 게 더 맛깔스럽다. 인생길도 아마 여행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젊어서는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를 부러워했지만, 이제는 다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남겨둔 오늘도 괜찮다는 마음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생활에서도 때로는 낯선 얼굴을 내미는 게 내일이다.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시간 속에서 매일 다른 표정으로 다가오는 인생의 내일.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안일한 삶을 추구하면 답보 상태에 머물기 쉽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풀어본다는 호기심으로 두려움을 누른다. 세상 어디를 가도 마주칠 새롭고 낯선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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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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