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옥과 양옥의 집 구조를 보면 한국인과 서양인의 차이가 명백히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옥은 집을 둘러싼 담장과 두꺼운 대문으로 전혀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문만 열면 온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데 비해, 양옥은 낮은 담장으로 훤히 다 드러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현관문만 닫으면 집안을 전혀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이 말이 정말 맞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어쩌다 직장일로 리셉션과 같은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한결 같이 장시간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자신을 드러내는 말은 하나도 없는 것이 신기하다. 날씨나 스포츠같이 위험요소(?)가 없는 이야기들은 물론 정치나 경제, 사회적 이슈에서도 팩트만을 놓고 어색함 없이 대화를 이어 나간다.
얼마 전에는 타부서와의 미팅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토의 시작에 앞서 참석자들 간의 어색함을 없애기 위한 소위 ‘아이스 브레이킹 타임’을 가졌다. 자기 자신에 대해 3가지를 말하되 2가지는 사실로, 1가지는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해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아맞추는 게임이었다.
나는 느닷없이 나에 대한 3가지 사실(그것도 하나는 살짝 바꾸어서)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 당혹스러워 허둥거렸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색깔, 우리 집 강아지, 그리고 가장 최근에 보았던 영화에 대한 3가지를 말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시간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미팅의 분위기가 훈훈해진(?) 것은 물론 나중에 복도에서 마주치더라도 “아, 할머니가 간발의 차이로 타이타닉호를 놓쳤다던 아무개로구나” 하면서 마치 잘 아는 사람을 만난 듯 반가운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인들은 모르는 사람끼리 모이면 정말 뻘쭘하고 어색하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있어도 서로 눈인사도 없이 각자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일쑤고, 모임에서 한 테이블에 합석을 해도 함께 온 사람들과만 말을 섞는다. 얼마 전 한국에서 방문한 여동생네 가족과 함께 한인 여행사를 따라 3박4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는데,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사 테이블에 합석을 하거나 버스 좌석에 나란히 앉게 되어도 일행이 아닌 사람과는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나 역시 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고 오히려 옆 사람이 쓸데없는 말을 시켜올까 봐 지레 방어태세를 갖추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번 여행을 하면서 문득 이 두드러진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물론 그 첫째 이유는 한국인들이 말 많은 사람을 별로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는 유교 문화권에서 성장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큰 이유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자신을 다 드러내는 깊고 진한 관계만이 진정한 관계이고 나머지는 가식적인 것, 쓸데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는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향이나 학교, 군대 등의 공통된 체험이 거의 필수적으로 따라 붙으니 이것만이 가치 있는 관계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우리의 말이나 문화는 타인과 수평적 관계를 맺는 데 매우 어려운 조건을 지니고 있다. 우선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부터 무어라고 해야 할지부터가 매우 까다롭다. 사실 한국인들이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은 상대를 고유한 개인으로 인식하는 이름이 아니라 직책이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사장님, 부장님에서부터 삼촌, 형부, 매제에 이르는 온갖 호칭을 생각해 보라). 이 호칭에는 이미 갑을관계가 설정되어 있는 만큼 호칭이 정해지는 순간 양측의 말투와 태도까지 정해진다. 이 관계가 분명치 않을 경우에는 굳이 나이를 밝혀서라도 누구 한 사람은 말을 놓아도 되는 “형님”이나 “선배”가 된다.
어느 쪽의 문화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좁고 깊은 관계는 그것대로, 넓고 얕은 관계는 그것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데 다 필요한 인간관계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미국을 살아가는 한인들이라면 기왕의 좁고 깊은 관계보다는 조금 더 수평적인 관계 맺기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끼리”의 좁고 깊은 관계는 자칫 배타적으로 흐르기 쉽다. 타인종, 타종교, 타문화를 배제하는 태도,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이런 저런 그룹이 나뉘어 섞이지 않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심정이 된다.
수평적 관계 맺기는 마음을 오픈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자라온 배경이나 문화는 달라도, 희로애락의 공통된 감정을 공유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을 열기가 쉬워진다. 굳이 굉장한 우정이나 인간관계를 기대할 것도 없이 오늘 당장 만나는 이웃들에게 환한 미소와 함께 다가가보라. 우리의 삶이 훨씬 즐겁고 윤택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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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국제로타리 커뮤니케이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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