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박종화. 음악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어느 날 그는 마음 깊숙이 품어오던 꿈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그랜드 피아노를 전국으로 옮겨가며 단 한 사람의 청중을 위해서라도 마음을 울리는 연주로 소통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 공간에 갇혀있던, 클래식 음악이라는 물리적 정신적 벽을 허물어 경계를 지우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가 선택한 첫 번째 만남의 공간은 제주도 바닷가. 연주 시간은 해녀들이 물질을 끝내고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하는 때를 고른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춤추는 파도 소리와, 바람이 너울거리는 소리가 피아노를 에워싸는 가운데 피아니스트는 리스트의 <물의 유희>를 연주한다. 예속을 벗어버린 자유의 힘. 물방울이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며 피아노 건반 위를 구르다가, 마침내 화음을 이루며 시원(始原)인 제 고향 바다를 향한다. 어떤 언어가 이 음악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는 이제 물질 나간 해녀 엄마를 기다리다 잠든 <섬집 아기>를 연주한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이 노래를 처음 알았다. 철모르던 그때도 <섬집 아기>를 들으면 괜히 슬프면서도 자꾸 따라 부르게 되었다. 상상의 파도 소리에 그 노래가 실려오면서 바다는 오래도록 아름답고도 슬픈 이미지로 남았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 들어도 여전히 뭉근한 통증이 밀려오는 노래다. 화음을 이룬 소리는 청중과 교감하며 가슴에 뭉쳐있던 젖은 구름을 걷어내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치유의 힘을 넌지시 알려주는 일종의 음악 처방 같다.
아프고 지친 바닷가 해녀들의 마음도 시청하는 우리의 마음도 치유되며 스르르르 정말 잠이 오는 것 같다. 눈을 뜨면 가볍고 따스한 햇볕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은 잠이다.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시간.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합일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인간과 자연의 공통어, 음악은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달래주는 긍정의 에너지원이 되어 삶을 일으킬 수도 있다.
마지막 장소로 그의 그랜드 피아노를 실은 컨테이너는 연천 최전방 DMZ를 찾는다. 군인들을 위해 연주하기 위해서다. 쇼팽의 <녹턴>이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군복 위를 흐른다. 마지막 곡으로 <아리랑>을 택했다는 그는, 민족의 한을 오롯이 풀어내며 강철 같은 군인들 가슴이 녹녹해지는 것을 애잔하게 지켜본다. 듣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적시는 것으로 그는 피아노 연주 일주를 마친다.
그가 바다로 공장으로 군사지역으로 피아노를 옮겨가며 해녀와 노동자와 군인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한 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을 터. 클래식 음악을 둘러싼 높은 벽을 허물고 어디에서도, 그리고 누구라도 음악을 즐기며 삶의 하중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바람과 파도, 공장의 소음조차도 음악이 될 수 있음을 소리로 일깨우며 창조의 놀이를 통해 기뻐하는 그의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다.
그를 따라다니는 ‘천재’ 음악가라는 수식어답지 않게 소탈한 연주자를 만난 느낌이다. 영혼이 자유로운 음악가.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는 그와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힘겨워 하며 방황한다. 그러나 자유를 그리워하면서도 자신의 어깨에 얹힌 그 많은 짐과 구속이 실제로 필요한지에 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는다. 돈, 명예, 학벌 등에 관한 대부분의 가치관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기준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잣대로 규정된 것들이다. 자신이 왜 뛰는지도 모르고 달리는 군중처럼, 앞서가는 사람 발꿈치를 보며 따라 걷는 건 아닐는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삶의 화두(話頭)일 것이다.
우리가 걷는 평범한 길에 순수와 열정을 지닌 그가 함께 걷고 있다. 벽도 담도 없는 무한한 공간에서 한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소박한 이들의 가슴을 열고 삶의 고단함을 달래준다. 마음의 짐, 조금만 덜어도 이렇게 가벼운 것을. 다소나마 자유로워진 듯 마주보는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음악과 침묵이 있는 듯 없는 듯 교차되고 섞이면서 마침내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화합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음악을 통해 자유를 되찾은 영혼이 빚어내는 조화롭고 아름다운 어울림. 그것이 그가 청중에게 궁극적으로 제시하는 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의 연주세계를 니체가 말한, ‘새로운 시작’이자 우리가 닿고 싶은 ‘거룩한 긍정’으로 해석하면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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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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