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스마트폰이 차지한 세상. 빨간 우체통에 들어있을 편지도, 친정어머니가 알려주던 손맛이나 살림법도 스마트폰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필요한 기다림과 그리움이라는 단어도 그 영리한 기계가 삼켜버렸다. 사라지는 것들을 지켜보는 마음은 쓸쓸하지만, 사이버 친구 하나쯤 필요한 세상이라는 것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편리함 이상의 만능 역할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한시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된 젊은 세대뿐 아니라 사용 기능이 극히 한정적인 노년층에서도 카톡으로 무료함을 달래고 외로울 때 곁을 지키는 친구 같은 존재. 한국의 지하철 승객 열 중에 일고여덟이 탑승 내내 스마트폰을 본다니 나이와 직업을 불문하고 없어서는 안 될 기기로 자리매김하는 추세인 것 같다.
자식이 어릴 때는 부모가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부모가 늙으면 노구를 기댈 수 있게 자식이 어깨를 내밀던 예전의 관계를 더는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어떤 관계에서도, 지나친 밀착이나 무관심이 아닌 적절한 거리라야 관계가 시들거나 병들지 않는다. 서로 관심 갖고 노력할 때 온기를 지닌 건강한 관계가 유지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관계를 이어주는 일마저도 사람이 아닌 기계가 대신하는 삶에 익숙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 관계의 균형을 잃거나 사람들과 부대낄 때에는 문명을 등진 오지에서 칩거하는 생활을 상상하며 삶을 조율하기도 한다. 그건 아마 문명의 파도를 벗어나 원시적이고도 자연친화적인 삶으로 돌아가면 모든 관계가 시원(始原)의 순수를 회복할 것 같은 환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문명을 배제한다는 청사진에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없을 뿐, 최소한의 문명은 포함되고 그마저도 한시적으로 끝날 상황임을 전제로 하기에 상상이 달콤할지 모른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 연휴를 앞두고 토론토에 대규모 정전사고가 발생했다. 갑자기 얼음비가 쏟아져서 교통이 마비되고 전선이 끊겨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밤에 전기가 끊기자 집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둠 속에 무섭게 얼어붙었고, 수족처럼 부리던 가전제품들은 순식간에 장식품이 되고 말았다.
시급한 것은 난방과 취사였다. 라면도 햇반도 전기나 가스가 없으니 바라만 보는 물건일 뿐이었고, 집안 가득한 한겨울 추위는 덜어낼 길 없는 두려움이었다. 아침이 밝자 촛불 없이도 빛을 얻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러나 책을 펼쳐도 허기와 추위로 굳어 있는 눈에 글이 들어올 리 없었다. 이불과 담요를 겹겹이 둘러도 허기진 몸을 파고드는 추위에 생각마저 얼어붙는 듯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문명 밖의 생활을 비웃는 듯한 속수무책인 시간을 보내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했다. 배고픔보다 더 두려운 건 격리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세상과의 물리적인 교류가 끊기고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의지하던 소통의 창마저 닫혔다는 단절감은 지독한 외로움을 불러왔다.
소통과 교류에 서툴면 외로울 수밖에 없다. 문명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거나 역류하는 소수의 삶에 편승하려면 그에 따르는 소외와 고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자연과 문명을 이분화하기에는 이미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문명에 길들었음을 인정할 무렵 전기는 복구되었고, 생태주의적 반문명(反文明)을 향한 일탈의 꿈은 자연스럽게 상상 속 장면으로 되돌아갔다.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 단계로 구분한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사회적 욕구, 자기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차츰 그 다음 단계의 욕구를 갈망하게 되어 결국 최상위 층인 자아실현의 욕구에 이른다는 이론이다. 현대 사회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하위 욕구의 대부분을 다른 어떤 시대보다 문명에 의존하고 있다. 문명의 이기(利器)를 활용하되 예속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정전사고는, 문명과 자연이 균형을 이루는 조화로운 삶에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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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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