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리포트를 제출했다. 어쩌면 나의 생애에 성적이 뒤따르는 글로서는 마지막일 것 같다. 여러 권의 책과 수편의 논문들을 섭렵해가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이견으로 대결해 가면서 한 자락의 글을 써 놓고 나면 그럴듯했다.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 나서 읽어보면 전연 아니었다. 심혈을 기울여 쓴 한 페이지를 다 지워버리고 서너 줄만 겨우 건지곤 했다. 그렇게 머리가 지끈거려도 공부를 한다는 것은 즐거웠다. 어떤 매력이 나를 끈질기게 잡아당겼다. 그러기에 잠에서 깨어나는 즉시 책을 움켜쥐고 덤볐다. 그렇게 한 달여를 버티며 썼으나 부족함이 더덕더덕한 것 같은 리포트를 보내야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목울대가 막히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소중하게 가꾸던 것을 보내고 난 그 공허함을 견딜 수 없었다. 딸에게 SOS를 쳤다. 첫손자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겠다 했더니 대 환영이라며 부랴부랴 비행기 표를 구해서 이메일로 보내왔다.
다음날 새벽 공항으로 나갔다. 일찍 체크인을 마치고 케이트를 향하여 유유히 걸었다. 눈을 들면 낯모르는 얼굴들이 끝도 한도 없이 줄줄이 앞으로 밀려왔다. 사는 게 너무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들뜬 젊은 여자, 입을 반쯤 벌리고 세상만사가 싫다는 표정으로 지쳐 보이는 초로의 남자, 시간에 쫓겨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눈을 번득이며 달리는 청년, 천차만별이다.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자신은 자신을 보지 못한다. 리포트를 쓰느라 책과 싸운 학생 할머니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공부하는 동안 내가 할머니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다.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생각만이 머리에 차 있었다. 남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표정이었으면 좋겠다고 상상을 해 보았다.
드디어 게이트에 도착해서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자리에 고릴라같이 큰 체구의 중년남자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백인은 아니지만 살결이 희고 머리가 밝은 노란 색이었다. 선량한 느낌이었으나 비애 같은 것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한참 후에 셀폰을 꺼내서 들여다보더니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울음을 참느라고 찡그린 표정이 내 가슴을 울렸다. 무슨 사연일까? 어떤 비보를 받고 가는 길은 아닐까? 절박한 순간의 인간에게 인간이 줄 수 있는 위로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를 위로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인간은 언어의 동물이라 하지만 언어에 기대어 위로를 주고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다. 차라리 혼자 울 수 있도록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옳은 일일 것 같았다. 붐비는 공항으로 손꼽히는 세계적인 오헤어 공항에 들어오는 사람, 떠나는 사람, 모두 자기 길을 가되 서로 다른 사연을 안고 있는 것이다.
큰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는 고기떼를 연상했다. 생각하는 고기떼들이다. 가슴에 철철 흐르는 눈물을 머금은 고기, 자지러지는 기쁨에 춤을 추고 싶은 고기, 오헤어 공항을 헤엄치고 있는 수많은 고기들은 나에게 각자의 사연을 들려주는 듯 했다.
나에게도 기쁜 사연이 있었다. 졸업을 한다는 손자 녀석, 태어났을 때 행여 으스러질까 조심스러워서 제대로 안을 수도 없었는데, 그 병아리 같았던 신비한 생명체가 자라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다니, 턱시도를 입고 춤을 추다니, 우등생 장학금을 받다니, 아이비리그 대학생이 되다니, 60여명을 집으로 불러서 축하파티를 하다니, 숨 막히는 축복이었다. 환희가 내 가슴에도 넘치고 있었다.
꼭 알맞은 나들이였다. “할머니, I never forget you!” 할머니를 안고 정중한 인사를 할 만큼 성장해버린 녀석. 살아 있다는 사실은 축복이었고 나들이는 환상이었다.
“조우(여동생)는 중학교 졸업, 나는 고등학교 졸업, 할머니는 대학원 졸업. 엄마, 우리 셋 어깨동무 했어요. 사진 찍어주세요.“
“Congratulations!”를 크게 외치며 셔터를 누르는 딸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발해 있었다.
<
주숙녀 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