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달 동안 한국에 다녀왔다. 개인적 휴가와 직장 일을 겸하여 모처럼 오래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느끼게 되는 복합적인 감정(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리워하고 동경했으나, 막상 마주해서는 서로의 이질감과 불편함만을 확인하게 되는)은 이번에도 여전했다.
마침 내가 한국에 도착한 주간에는 ‘어린이 날’과 ‘어버이 날’이 들어있어 온 나라가 ‘가족 마케팅’으로 들썩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특히 TV에서는 가족애를 주제로 한 다큐들이 쏟아졌는데, 내 휴가의 첫째 목표가 ‘연로하신 어머니와 함께 시간 보내기’였던 만큼 우리 모녀는 리모컨을 쥐고 TV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공중파, 종편, 케이블 등 수십 군데의 방송들이 가족을 주제로 한 다큐들을 쏟아냈지만, 가족해체가 본격화한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효의 개념과 가족의 패러다임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보기 힘들었다. 여전히 시골에 홀로 남은 70대의 며느리가 90대의 치매 시어머니를 봉양한다는 식의 구태의연한 스토리를 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색적인 사연을 담은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보고 나서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었다.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1천 평이 넘는 밭에서 죽순 농사를 짓는 60대 여성이었다. 이 여성에게는 아직도 카리스마 짱짱한 구순의 호랑이 시어머니가 계셨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신세대 며느리가 있었다.
구순의 노모는 밭농사와 집안일로 눈코 뜰새 없는 며느리에게 걸핏하면 불호령을 내리기 일쑤였지만, 귀여운 손주며느리에게는 무한한 면책 특권을 부여해 밭농사를 전혀 시키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의 며느리에게도 “밭일을 거들라”는 특명을 내렸는데, 이튿날 아침 밭에 나타난 사람은 놀랍게도 며느리가 아니라 며느리의 친정엄마였다. 딸 대신 자신이 돕겠노라고 나타난 안사돈을 보고 주인공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프로그램은 결국 안사돈들끼리 오순도순 우정을 나누며 사이좋게 농사를 짓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글쎄 이 문제가 그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될 일인가?죽순 밭에 나타난 ‘헬리콥터 맘’도 놀라웠지만,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이 가족의 역학관계에서 남자들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였다. 이 프로그램에는 주인공 여성의 남편도 나오고, 신세대 며느리가 “오빠”라고 부르는 아들도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농사일을 홀로 감당하며 고군분투하는 아내 혹은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장면은 단 1초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들은 고부간의 갈등에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라고 짐짓 모른 체 했을지도 모르겠다.
60대 아버지야 그렇다 쳐도 30대 아들(그는 이 집안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지 않은가!)조차도 어머니의 고통에 무심했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이는 아마도 그 아들이 특별히 불효자라서가 아니라 “어머니는 으레 밭일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너는 집안일은 몰라도 되니 공부만 잘하라”는 말을 수 없이 들으며 자라났을 것이다.
며느리를 집안의 일꾼으로 여기는 구순의 노모, 고추당초보다 맵다는 시집살이를 해왔으나 정작 자신은 며느리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어머니, 집안일에서 아내 편드는 것은 팔불출이라 생각하는 아버지, 어머니는 으레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아들, 성인이 된 후에도 시시콜콜 엄마에게 보고하는 딸, 그리고 자신의 딸에게는 절대로 힘든 일을 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어머니…저마다 지난 1세기 한국사회가 겪어온 급격한 변화의 양상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가정이나 세대 갈등은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에게는 그 폭이 너무 크다. 이는 아마도 역사 속에서 합리적 사고가 성숙할 수 있는 근대를 거치지 못한 탓이 클 것이다. 한국 사회의 이런저런 단면들에서 보이는 불균형이 안타깝다. 결국 사람이나 사회나 정상적인 성장의 단계를 생략하다보면 미처 생각지 못한 부작용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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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민 국제 로타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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