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아진 위상 해외 거물들 방한 원로 신진 디자이너 665개 쇼
▶ 디자인서 쇼·마케팅까지 소화 관람객 4만여명 이상 ‘성공적’
“전 세계 패션위크를 돌아다녔지만 이번 서울패션위크는 최고의 경험이었다.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바깥의 어린이들마저 패셔너블한, 활력과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에서 훌륭한 디자이너들을 많이 만났다. 매우 흥미로웠다.” 미국의 대표적 백화점 체인 삭스 피프스 애비뉴의 에릭 제닝스 부사장이 이렇게 말했을 때, 절반은 미국식 서비스용 찬사로 에누리해 들어야 한다. 그러나 정구호 총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며 대대적으로 변모한 서울패션위크가 이전과는 다른 국제적 위상을 갖게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세계 패션계를 쥐락펴락하는 패션 평론가 수지 멘키스가 왔고, 홍콩 출신의 막강한 패션 블로거 수지 버블도 쇼를 찾았다. 버그도프 굿맨, 셀프리지, 봉 마르셰, 10꼬르소꼬모 같은 해외 유명 백화점과 판매처의 바이어와 외신기자들이 대거 참석, K-패션이란 게 실체가 있는 걸까 의아해 하던 사람들의 의구심 일단을 풀어줬다.
스폰서십을 도입해 16~21일 엿새간 DDP에서 진행된 ‘2016 봄/여름 헤라서울패션위크’가 시상식으로 피날레를 장식하고 막을 내렸다. 파격적으로 시상 시스템을 도입한 서울패션위크는 크게 ‘서울컬렉션’과 ‘제너레이션 넥스트’ 두 부문으로 나눠 엿새간 총 66개의 쇼를 선보였다. 박춘무 지춘희 박윤수 장광효 같은 관록 있는 디자이너들과 홍혜진 계한희 김무홍 고태용 등 최근 가장 핫한 젊은 디자이너들이 서울컬렉션을 꾸몄다면, 신진 디자이너들의 등용문인 제너레이션 넥스트는 김범, 장소영, 이지선, 이지연 등의 재기 넘치는 컬렉션으로 박수 갈채를 받았다. 서울컬렉션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한 ‘베스트디자이너상’은 브랜드 디그낙의 강동준 디자이너가 수상했으며, 생애 단 한 번뿐인 신인상 ‘헤라서울리스타상’은 브랜드 블라인드니스의 신규용 디자이너에게 돌아갔다.
■한국적인 옷 K-패션
베스트디자이너상을 받은 디그낙의 강동준은 ‘한국적인 옷’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디자이너다. 조선시대의 남성 도포에서 모티프를 따온 이브닝 코트, 승려를 떠올리게 하는 아방가르드한 회색 수트, 흔히 ‘노방’이라 부르는 오간자를 잠자리 날개처럼 삽입한 블랙 수트…. 한복 특유의 우아함을 서양 복식에 적용한 강동준의 디그낙 컬렉션은 왜 그의 이름이 코리아니즘에 빈번하게 소환되는지를 설명해준다. 해외 컬렉션에 참가하며 처음 들었던 “한국적”이라는 반응에 놀랐을 정도로 무의식의 반경에 머물러 있던 우리 고유의 옷은 아예 “진지하게 정말 한국적인 것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새로운 시도로 이어졌고, 여백의 미를 구조적으로 옷에 담는 디그낙 특유의 디자인을 산출해냈다. 국제행사를 지향하며 포맷을 재구성한 서울패션위크가 베스트디자이너로 그를 지명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일이기도 하다.
올해의 신인 디자이너로 선정된 신규용의 블라인드니스는 도심에서 즐기는 휴가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을 주제로 어번 리조트 룩을 선보였다. 일상이 휴가가 되는 기적 같은 삶! 소매 없는 브이넥의 후드 재킷에 가죽 팬츠를 매칭한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차림새는 미니멀하고 간결한 실루엣이 두드러지는 ‘신규용 디자인’의 개성을 잘 보여줬다.
■한국사회에 농담을 거는 옷
브랜드 KYE의 디자이너 계한희가 선보인 재기발랄한 컬렉션은 ‘증오를 증오한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서로를 향한 혐오가 콜레라처럼 창궐한 한국 사회에 그는 통통 튀는 형광의 원색으로 경쾌하게 농담을 건다. 티셔츠 한가운데 커다랗게 새겨진 펑키한 글자들은 ‘Hate’(증오). KYE의 시그니처 장식인 고무밴드에도 ‘Hate’. 대담하게 ‘증오’를 컬렉션의 제목으로 내건 이 재능 있는 디자이너는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이 그저 하나의 재미가 되도록 만든 디지털 문화에 옷으로 항의하고 있는 중이다.
한상혁의 ‘HEICH ES HEICH’는 영화 빠삐용에서 폴 뉴먼이 입었던 죄수복을 떠올리게 하는 경쾌한 줄무늬를 들여왔다. 캐주얼과 포멀의 변증법이 이뤄지는 찰나. 정과 반이 충돌하면서 일으키는 또 하나의 반응을 옷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게 디자이너의 설명이다. 젊음과 나이듦, 남성과 여성, 흑과 백의 충돌로 카테고리를 확장시켜가며 농담 같지만 통찰이 담긴 주말의 옷차림을 만들어냈다.
■깨어나다, 소녀에서 여자로
남성 디자이너들의 대활약 속에 돋보인 여성의 옷들을 살펴보자. 청순한 소녀에서 관능적인 여인으로의 도발이 많은 주목을 받은 이명신의 ‘로클래식’ 컬렉션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묻는다. 부드러우면서도 대담하게 물 흐르듯 몸을 감싸는 실루엣은 순수한 감성 속에 내재한 섹슈얼리티를 발굴하려는 디자이너의 색다른 시도였다. 모든 여성에게는 내재된 섹시함이 있는데, 여성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이분법적으로 분리돼 있는 우리 사회에 자연스러운 섹시함을 옷에 담으려는 그의 노력이 어떤 균열을 낼 수 있을지 주목할 만하다.
K-패션을 한국여성들이 입는 예쁜 옷이라고 정의한다면, 이지윤의 자렛에 끌렸을 테고, 힙한 라이프 스타일의 상징으로 여행을 흠모한다면 김재현의 럭키 슈에뜨가 눈길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열대식물로 가득한 정원을 옷 위에 담은 빅 파크, 심플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니트의 매력을 일깨운 수미수미, 연분홍 데님이 실용적이면서도 더 없이 여성스러웠던 ‘더 스튜디오 케이’도 있다.
헤라서울패션위크의 피날레는 ‘텐소울’ 디자이너 10명의 레드 컬러를 주제로 한 컬렉션이 장식했다. 서울디자인재단에서 글로벌 역량을 갖춘 국내 디자이너들의 해외마케팅을 지원하기 위해 선정한 젊은 디자이너들이다. 디자인에서부터 쇼,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옷의 전 유통과정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행사였고, 원로부터 신인까지 두루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 행사였다. 엿새간 총 4만4,000여명의 관람객이 찾아왔다니, 첫 출발로서는 성공적이라 평가해도 틀리지 않겠다.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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