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방하원의장으로 선출된 폴 라이언(45) 의원이 ‘의장직’을 놓고 조건을 붙였었다. 존 베이너 의장의 갑작스런 사퇴 발표 이후 후임자로 주목을 받자 그는 ‘가족과의 주말’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10살, 12살, 13살로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 아빠로서 주말은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 주말 기금모금 행사에는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도 아무 말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라이언이 의장으로 선출된 것을 보면 하원 공화당이 ‘조건’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연방하원의장직은 막강한 자리다. 권력서열로 볼 때 대통령, 부통령 다음이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라면 기어이 오르고 싶은 고지일 텐데, 40대 중반 젊은 나이에 고지가 눈앞인데도 그는 뒤로 물러날 태세였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 해도 가정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면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라고 그는 선을 그었다.
라이언의 ‘조건’은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여성도 아닌 남성이 ‘직업적 성공이냐 가정이냐’를 저울질하며 가정에 확실하게 무게를 두었다는 사실이 미국 가정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양육에서 전통적으로 뒷자리에 있던 아빠들이 앞자리로, 때로는 운전석으로 옮겨오고 있다.
고위직 남성이 ‘아빠’로서 충실하기 위해 사임한 케이스로는 로버트 라이시 전 노동부 장관이 있다. 클린턴 행정부 1기가 끝나던 무렵 그는 갑자기 사임결정을 내리고 1997년 1월 물러났다. 10대로 접어든 두 아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계기가 있었다.
장관직 수행 4년 동안 그는 일에 완전히 빠져있었다. 매일 새벽같이 출근해 한밤중에 돌아오며 온통 일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출근하면서 막내아들 방에 갔더니 아들은 잠도 덜 깬 상태로 “퇴근하면 (자기를) 깨워달라”고 했다. “네가 잠들어 있을 테니 내일 아침에 보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 “그냥 아빠가 집에 있는 지 없는 지 알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 순간 그는 장관직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 책에서 썼다.
라이언 의장의 가족은 주말가족이다. 그가 9선 의원으로 워싱턴 D.C.에서 일하는 내내 아내 와 삼남매는 위스콘신 그의 고향에서살고 있다. 정치권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놀며 자라도록 하겠다는 부부의 결정이다. 라이언은 매주 주말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데, 그 시간이 그에게는 삶의 산소 같다고 한다.
일에 치우쳤던 라이시가 삶의 방향을 뒤늦게 가족 쪽으로 돌렸다면 그 다음 세대인 라이언은 일찌감치 일과 가정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진일보다. 남성들의 의식이 진화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하원의장 후보가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주말은 가족과 함께 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어려웠을 것이다. 남성에게는 ‘가정의 가치 존중’이 되는 일이 여성에게는 업무수행의 결격사유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은 일보다 가정에 마음이 가있어서 중책을 맡기기에는 미덥지 않다는 인식이 가시지 않고 있다. 여성에 대한 이중 잣대는 여전하다.
지난 달 야후의 CEO인 마리사 메이어는 출산휴가를 2주만 쓴다고 해서 여성들의 분노를 샀다. 메이어는 오는 12월 딸 쌍둥이를 출산할 예정이며 짧게 쉬고 계속 일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즉각 ‘실망스럽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야후의 출산휴가는 16주인데 CEO가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직원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출산휴가를 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보여줘야 할 여성 지도자가 잘못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포춘 1,000대 기업 중 여성 CEO는 단 4%. 여성 경영자들은 끊임없이 남성 경영자들에 비교당하며 능력 증명의 부담감이 무의식 속에 있을 수 있다. 마음 편하게 16주를 쉴 수가 없는 것이다. 해결책은 자녀양육 책임을 부부가 함께 지는 것이다.
폴 라이언이 워싱턴에서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내가 가정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세법 전문 변호사이자 로비스트였지만 지금 ‘엄마’로 일하고 있다. 반대로 아내가 스트레스 심한 일을 한다면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면 된다. 대기업 여성 CEO 중 남편이 자녀양육을 전담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가정에 대한 남성들의 인식이 변하는 것은 반갑다. 거기서 한발짝 더 나갔으면 한다. 가정이라는 자동차의 운전석에 엄마만 앉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빠도 앉을 수 있다. 남성들이 ‘운전석’에서 편안할 때 부부는 마침내 평등하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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