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잠잠해 졌다. 쉬~쉬~ 나름으로 꽤나 긴 시간을 분주하게 허대더니 이제 일을 다 마쳤는지 잠잠하다.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물 끼얹는 소리가 들릴 때는 물레방아 생각이 난다. 세계 최첨단의 문명국 한 복판에서 기계로 그릇을 씻으면서 그 옛날의 물레방아 생각을 한다는 것은 뭔가 좀 맥이 통하지 않는 것 같지만 옛날의 끈을 강력히 붙들고 있음일까, 어쩌면 우리 정서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식기 세척기가 작동하는 것은 전기의 힘이고 물레방아는 물의 힘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노고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디시 워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도 그의 임무수행에 땀 흘리고 있음이 느껴진다. 부엌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데 대한 값을 치르느라 수고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릇을 워셔의 행간에 차곡차곡 끼우며 내 물건들도 이처럼 정리를 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유리컵은 유리컵대로 접시는 접시대로 질서 있는 정렬상태를 점검하며 마음도 이처럼 정돈해야 한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짐한다. 함부로 구겨 넣은 옷가지들은 부피를 많이 차지하면서도 볼품이 사납다. 곱게 접거나 돌돌 말아서 눕히면 부피가 훨씬 줄고 차분해진다. 쥐꼬리만 한 지식이 정돈되지 못한 채 칡넝쿨로 엉켜있다. 이것을 말하려면 저것이 날뛰고 저것을 생각하면 엉뚱한 이론이 앞을 가로 막는다. 머릿속 정리도 정연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어떤 섭섭함이나 자존심 상한 일을 기억하며 분노에 가까운 것으로 잊지 못하고 있는 것들도 곱게 벗어버리고 스스로 낮아지고 낮아지면서 잘 씹어 꿀떡 삼키자고 내 마음과 흥정해본다. 세척기에서 나오는 그릇처럼 윤나게 맑아보자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릇이 세척기에서 씻어지는 작업이 끝나고 나면 후끈한 열기로 그릇들의 습기가 정갈하게 마른다. 알맞은 시기에 그릇을 하나하나 꺼낸다. 그때의 그릇의 온기에 나는 매료된다. 그때의 그릇은 하나의 생명체다. 깨끗이 목욕을 시킨 내 아가를 안은 것처럼 정스럽다. 나는 그 따스한 접시의 체온이 가시기 전에 가만히 안고 한참을 서 있다. 그 따스함 속에 스민 그릇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 그릇에 어떤 음식을 담았을 때의 그리운 추억에 한동안 머문다.
음식과 그릇은 운명적 만남이다. 음식은 그릇에 담아짐으로써 음식다운 음식이 된다. 어떤 경우라도 음식과 그릇은 절대적인 우호관계다. 빤한 얘기 같지만 범상한 관계가 아니다. 음식은 알맞은 그릇에 담아져야 비로소 우리의 시각과 미각을 충동하면서 우리를 즐겁게 만들어 준다. 음식과 그릇은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가 없다. 그들의 마음 구조들은 헤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충분한 교류가 끝나면 함께이던 순간의 흔적을 세척기 속에서 씻어낸다.
내 손이 해야 할 일을 기계에 맡기는 문명사회의 편의가 좋기도 하지만 개으름이 좀 부끄럽다. 음식과 합을 이루어 성의를 다 한 후 세척기 속에서 수신제가한 후에 나오는 그릇의 정갈함은 개운하기 이전에 나로 하여금 어떤 절대자로부터 받은 선물처럼 지순함을 맛보게 한다.
누구의 손을 잡았을 때 다스운 온기가 잡히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의 세포들이 마구 웃는 것 같다. 온기는 생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온기가 주는 생명감, 고독감을 녹여주는 듯한 야릇한 친밀감은 설명이 없어도 이해가 된다.
뜨거운 것은 견딜 수 없고 오래가지 못한다. 냉기는 다음에 오는 냉혹성이 유추되어 미리부터 떨린다. 그러나 온기는 질리지 않는다. 한 없이 포근하다. 그 포근함은 여울을 감도는 물살처럼 나의 심연을 감돌아서 안온함으로 내 가슴에 안주한다.
온기 어린 표정, 온기 있는 말씨, 온기 넘치는 대화를 낳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디시워셔에서 꺼낸 접시의 온기는 쉬 식어버리지만 식지 않은 온기를 지닌 사람이고 싶다. 생명이 있는 한 온기는 존재 한다. 온기를 잃었을 때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해야 한다. 다스함이 내재하는 인간으로서의 방향을 알아야 할 것 같다. 과연 인간의 온기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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