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비 바리는 ‘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해 온’ 도시다. 베토벤과 괴테와 쇼팽이 그 낯선 사람들이었고 요즘에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그 중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체코공화국의 엄지손가락 끝 부분만한 휴양지 카를로비 바리에서 열린 제50회 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프라하 공항에 내리니 안내문이 체코어와 영어에 이어 한국어로 쓰여 있다. ‘한국인들이 온다. 한국인들이 온다’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보헤미안 스메타나가 ‘나의 조국’에서 유려하게 스케치한 몰다우강으로 흐르는 청계천 규모의 테플라강이 도심을 관통하는 카를로비 바리는 동화 속 마을처럼 곱다. 시내는 왕복 30분이면 구경을 다할 만큼 작다.
프라하 서쪽 81마일 지점 서부 보헤미아에 있는 이 도시는 14세기 후반 보헤미아왕 찰스 4세가 세웠는데 300여개의 온천이 있어 옛날부터 휴양지와 질병 치료지로 유명하다. 독일어로 칼스바트라 부르는데 이는 ‘찰스의 온천’이라는 뜻이다. 순전히 타인들인 관광객에 의지해 먹고 사는 도시여서 강 양 옆으로 호텔과 식당과 보석상들이 줄을 섰다. 특히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때는 영화제가 열리는 7월 초순이어서 거리는 인파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는데 영화제가 끝나면 관광객들도 썰물 빠지듯이 몰려나간다고 우리를 안내한 즈덴카가 알려줬다.
때마침 유럽을 강타한 폭염 속에 자갈길을 걷는 관광객을 태운 마차의 말밥굽이 고전의 소리를 내는 거리를 가다가 괴테가 묵은 모차르트 호텔 앞에 섰다. 독일어로 ‘Hier wohnte Goethe 1786’(1786년에 괴테가 여기 살았노라)라고 쓰인 호텔 정문 옆에 괴테의 초상이 걸려있다(사진). 모차르트 호텔이 있고 모차르트 공원도 있는 것으로 봐 ‘프라하’ 교향곡을 짓고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초연도 프라하에서 한 모차르트도 프라하에 온 김에 여기를 찾아와 목욕을 했을 법하다.
손바닥만 한 도시를 정찰하듯이 헤집고 다니다가 보헤미안인 드브로작과 칼 막스가 묵었던 집과 베토벤 호텔과 쇼팽 호텔도 목격했다. 숙소인 사보이 호텔 바로 옆의 쇼팽 호텔은 쇼팽이 묵었던 곳임에 분명한데 시내 쪽에 가까운 베토벤 호텔은 그의 초상까지 달았지만 어딘지 가짜 냄새가 났다.
숙소 앞에 있는 대형 칼 막스의 앉은 조각상이 이 나라의 과거를 상기시키는데 전신이 공산주의 국가답게 주민들이 너도 나도 끽연을 한다. 주민들은 영어는 못해도 과거 지배국인 러시아어와 독일어는 다 한다. 호텔 종업원도 나보고 “켄넨 지 도이치 슈프레헨”(독일 말 할 줄 아세요)라고 묻고 택시 운전사도 내가 서투르게 말한 “바르텐 지 드라이시히 미누텐”(30분만 기다려 주세요)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텔마다 스파요 길 곳곳에 탄산수 수도가 있어 사람들이 컵을 들고 다니면서 건강하겠다고 물을 받아 마시는데 나도 손으로 받아 마셔보니 찝찔하다. 걷다 피곤하면 강가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셨는데 그 맛이 버드와이저는 저리 가라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떼를 지어 다닌다.
영화제 본부는 공산정권 시대 세운 회색 콘크리트 건물 테르말 호텔인데 그 몰골이 주위의 예쁜 집들에 비해 더욱 꼴불견이다. 여기서부터 스타들이 머무는 18세기에 세운 그랜드 호텔 풉(호텔 이름치곤 고약하다)까지 왕래하면 시내 구경은 다한 셈. 그랜드 풉 호텔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모델이 된 곳으로 둘이 모양이 많이 닮았는데 여기서 007시리즈 ‘카지노 로얄’도 찍었다고 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이번 여행서 할리웃외신기자협회(HFPA)를 극도로 미워하는 여기자 샤론 왝스맨을 만나 와이트와인을 함께 마신 것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왝스맨은 연예전문 인터넷 사이트 ‘랩’의 창간자로 오래 전부터 HFPA의 별로 아름답지 못한 가십거리를 미주알고주알 보도, HFPA의 ‘페르소나 논 그라타’가 된 사람. 우리를 안내한 반 체코 반 한국인 피가 섞인 타티아나의 소개로 만나 식사를 함께 했는데 왝스맨이 산 포도주를 마시면도 우리와의 악연 탓에 신포도주 맛이 났다.
영화제에는 한국 영화도 몇 편 출품돼 ‘간신’과 김기덕의 ‘스톱’(Stop)을 봤다. ‘간신’은 준 포르노영화여서 보다 나왔다. ‘스톱’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김기덕의 영화여서 극장은 기자들로 초만원을 이뤘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방사능 누출사고의 후유증을 다룬 작품으로 블랙 코미디풍의 메시지 영화다.
하루 틈을 내 몰다우강이 흐르는 프라하를 찾았다. 더위와 습기가 이를 갈 듯이 치열한 속에 카프카의 발자국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미로들의 자갈 골목길을 걸으면서 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공사 중인 대통령궁을 바라보자니 자연 카프카의 ‘성’이 생각났다. 프라하는 몇 년 전에 처음 들렀었는데 그런 탓인지 기시감이 있어 이 고도의 품위와 아름다움이 옛만 못했다.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구나 하며 혀를 찼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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