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액 판돈 도박판처럼... 살벌한 실적경쟁 일상화
▶ 리세션 이후 해고 불안... 과중한 업무 시달리고 단속 강화도 스트레스
[금융업 자살률 타업종 1.5배… 왜?]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대학에 진학하면 인생의 성공을 절반쯤 보장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어 대학을 무사히 마치고 월스트릿 금융업계에 일자리를 잡으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또 하나의 성공담이 완성된다. 그러나 고액의 연봉이 주어지는 월가의 일자리는 주당 80~100시간의 살인적 업무량과 피를 말리는 실적경쟁을 감당해야 하는 ‘골병드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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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6일 골드만 삭스 샌프란시스코 지사의 1년차 애널리스트인 스물 두 살의 청년 사르브시레스 굽타가 새크라멘토 스트릿과 브루클린 플레이스 코너에 위치한 자신의 아파트 건물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그가 추락사했다고 발표했지만 업계 안팎에서는 지난해 꼬리를 물고 발생한 젊은 뱅커들의 자살과 굽타의 죽음 사이에 뚜렷한 연관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월가의 금융업 직원들은 모두 36명. 한 달 평균 3명이 자살을 택한 셈이다. 올해 첫 5개월간 자살한 ‘월가의 사람’만도 12명을 헤아린다.
이를 두고 포천지는 지난 2월 ‘월가에 자살 전염병이 돌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그저 단순한 우연으로 돌리기는 빈도가 지나치게 잦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직종별 근로자 사망률을 조사하는 NOMS의 발표에 따르면 금융서비스업 종사자의 자살률은 전 업종을 망라한 전국 평균치에 비해 1.5배가 높다.
또 근로자 자살률의 업종별 순위를 보면 의사가 1위였고 치과의사와 수의사, 금융서비스업 종사자가 그 뒤를 이었다.
따지고 보면 월스트릿은 거액의 판돈이 걸린 이판사판의 도박판이나 마찬가지다. 직원들의 스트레스로 충만한 이곳의 상황은 2008년 경제위기와 그 뒤를 이은 리세션을 거치면서 더욱 악화됐다. 보너스는 줄어들었고, 정기적인 레이오프가 단행됐으며 정부의 단속규정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물론 다른 업종의 종사자들 역시 리세션의 여파로 애를 먹었지만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금융위기의 진원지였던 월가였다.
이처럼 어려워진 상황은 투자 금융업계의 ‘솎아내기’로 이어졌다. 가중된 스트레스를 견뎌내는 직원은 살아 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상대적 ‘약골’들은 정리되거나 스스로 직장을 떠났다.
정부의 강화된 규정과 단속도 금융업자들의 심리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월가의 금융업 근로자들은 언제 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집단적 공포감에 시달렸고, 위험한 파생상품을 취급해 온 중역과 담당자들은 언제 법의 철퇴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서브프라임 상품을 대량으로 유통시켜 시장의 거품을 유도했다는 이유로 세간의 눈총을 한 몸에 받은 것은 물론 사법적 책임까지 감당해야 했다. 금융파동과 리세션 이후 월가의 근로자들이 압력밥솥에 들어가 있는 듯한 심한 중압감에 시달렸으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연방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분석 중인 2008년 이후의 업종별 자살 분석결과는 올해 후반에야 공개될 예정이다. 그러나 CDC의 또 다른 자료는 1999년에서 2010년에 이르는 기간 35~64세 연령대에 속한 미국인의 자살은 무려 28%가 늘어났음을 보여준다.
이 정도 연령이면 대부분 커리어의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직장에서 혹은 사업장에서 완전히 입지를 굳히기에 충분한 나이다.
인종과 연령에 따른 차이도 확연이 드러났다. 35~64세 연령대에 포진한 백인의 자살은 같은 기간 40%가 증가했고 50세 이상의 백인 그룹에서는 48% 이상 늘어났다.
CDC의 전문가들은 특정 기업이나 업계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공평한 처사는 아니지만 금융업자들이 실패와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것이 월가 근로자들을 절벽 끝으로 내모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입을 모은다.
뉴델리에서 출생한 굽타는 아이비리그에 속한 펜실베니아 대학을 졸업한 후 골드만 삭스에 입사했지만 채 1년을 버티지 못한 채 지난 3월 사표를 던졌다.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해 개인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사직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근무시간 축소를 약속한 회사의 설득에 넘어가 1주일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압력과 성화를 견딜 수 없었다.
골드만 삭스는 약속대로 그의 작업시간을 줄여주었고 직장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한 카운슬링을 받도록 조치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담당하는 장거리 통신과 미디어 및 테크놀러지 그룹의 업무는 대형 인수합병 거래가 잇따르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의 근무시간은 어느 결에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4월16일 새벽 2시40분, 그는 인도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더 이상 못견디겠다. 지난 이틀간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에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이 잡혀 있고, 프레젠테이션도 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지금 사무실에 혼자 있다. 한 시간쯤 더 일을 하고 집에 갔다가 다시 출근해야 한다”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아들의 사직을 강경하게 만류했던 굽타의 아버지는 “15일간 휴가원을 내고 인도의 집으로 돌아와 쉬라”고 권했지만 굽타는 “지금 그럴 형편이 아니다”고 말했다.
굽타가 변시체로 발견된지 한 달 뒤인 지난 5월 말, 이번에는 맨해턴의 모에리스 & Co.에 근무하던 토머스 J. 휴즈(29)가 자신의 24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휴즈의 시신에서는 마약이 검출됐고 그가 투신한 맨해턴의 고급 아파트에서는 고무줄로 묶은 여러 개의 현금 다발과 코케인이 든 가방, 그 외 4종류의 마약의 흔적이 검출됐다. 경찰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그가 마약을 복용한 환각상태에서 투신한 것으로 보고 있다.
토머스의 아버지는 “내가 아는 것은 그가 열심히 일했고 과도한 업무량으로 상당한 중압감에 시달렸다는 게 전부”라며 “아들은 일에 눌리고 시간에 쫓겨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푸념을 여러 번 했지만, 그것이 그가 스스로 선택하고, 또 좋아했던 일이었다”며 회사 측에 책임을 물을 의도가 없음을 시사했다. 하지만 굽타와 휴즈의 연이은 죽음은 월가에 커다란 충격파를 몰아왔다.
특히 하기 대학생 인턴들이 들어오는 시기에 맞춰 두 명의 월가 근로자가 잇달아 자살했다는 사실에 대해 금융업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굽타의 시신이 발견된 후 골드만 삭스의 투자은행 공동 총수인 데이빗 솔로몬과 부회장 존 와인버그는 부랴부랴 샌프란시스코 지사를 방문, 직장과 개인생활 사이의 균형 잡기를 주제로 직원들과 소그룹 미팅을 가졌다.
골드만 삭스는 또 일 잘하는 모범사원으로 동료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굽타를 위해 회사 차원의 추모모임을 열기도 했다.
실제로 굽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실성과 효율성을 과시했고 이것이 과중한 업무편중을 거들었던 요인으로 알려졌다.
지난해부터 올해 5월까지 자살로 인생의 막을 내린 48명의 월가의 인재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힘들다.
학창시절부터 늘 선두그룹에 속했던 이들은 입사했을 때 이미 지친 상태였고, 최고 엘리트끼리의 숨 막히는 2라운드 경쟁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인 상태였을 수 있다.
금융업계 종사자들 사이에 우울증 환자가 유난히 많고 이런 우울증을 유발한 근본 원인이 잡아먹느냐 먹히느냐 식의 살벌한 실적경쟁, 혹은 생존경쟁이라는 사실은 기본 상식에 속한다.
최근 몇 년간 월가의 간판기업들은 자체 근무규정에 대대적인 손질을 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치열해져 가는 실리콘밸리와의 엘리트 인력 유치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취한 조치다.
골드만 삭스와 크레딧 스위스는 애널리스트들에게 토요일 하루를 쉬도록 허용했다. 특히 크레딧 스위스는 쉬는 날 직원들에게 업무와 관련한 이메일을 보내지 말 것을 아울러 지시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매월 돌아오는 주말 가운데 4일을, JP 모건 체이스는 한 달에 한 차례의 주말을 선택해 쉴 수 있도록 했다.
이런 조치들은 지난 2013년 뱅크오브 메리린치의 런던 사무실에서 일하던 인턴이 3일 연속 철야근무한 후 발작사한데 뒤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뇌신경의 과도한 흥분상태는 치명적인 발작으로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토요일 하루를 쉴 경우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일요일 근무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오히려 가중된다며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주당 80~100시간의 살인적 근무 스케줄과 밤샘작업을 완전히 없애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매년 월스트릿에 발을 딛는 초짜 근로자들이 엄청난 업무량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대응방법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경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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