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로한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에 의지하며 정기진찰을 받으려 오셨다. 간병인의 도움도 없이 힘겹게 혼자 버스를 타고 오신 것이다. 간병인에게 다른 일이 생겨 함께 올 수 없었고 근처에 사는 자녀들은 다 바쁜 것 같아 아예 부탁도 안하고 용감하게(?) 버스를 타 보셨다고 했다. 진찰 후 처방전을 받는 손은 평소처럼 떨리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구부러져 있었다. 심한 노인성(퇴행성) 관절염이다.
그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이 읽혀진다. 어젯밤도 관절이 쑤시고 등이 아파서 진통제를 복용했지만 아픔은 여전하여 뜬 눈으로 잠을 설쳤다고 했다. 너무 아플 때 복용해 보시라고 일전에 권했던 중독성과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마약성분 강한 진통제는 사용을 안 하시겠단다. 혹 중독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 차라리 참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너무 오래 써서 관절이 다 마모되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어, 아픔을 내 생활의 동반자로 모시고 더불어 살기로 작정했지. 별거는 안 되는 모양이지” 하며 쓴 웃음을 지으며 내려뜨는 두 눈에는 고통과 체념의 그림자속에 포용의 깊은 빛이 어린다.
“이제는 그만 애들에게 부담이 안 되게 위에 계신 분이 빨리 데려가셨으면 좋겠어”라는 말씀이 듣는 나의 가슴에 싸하게 쓸쓸한 여운을 뿌린다. 한계가 정해져 불가항력인 우리 삶의 궤도가 떠올라서다. 인간의 몸은 20세부터 기능이 매년 1%씩 감소되어 120세에는 생존 기능이 0%가 된다. 현대의학은 인간의 수명을 좀 연장 시켰으나 그것에 동반되는 할 싱싱한 건강, 노화는 해결하지 못했다. 현 의학의 한계 점이다. 또한 이를 수용할만한 사회적 대책이나 대안도 아직은 없는 게 현실이다. 절름발이로 발전된 의학의 부조화이며 일종의 비극이다.
“아니죠, 받은 생명을 잘 관리하셔서 거동을 하실 수도 있고 의식과 영혼이 살아 있으시니 건강히 오래 사셔야죠. 그것이 자식들이 바라는 것이죠” 연민과 함께 위로 드리고 싶은 마음에 말을 이어 갔다. “세월 속의 노화를 누가 멈추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머님의 자녀들과 우리 모두도 앞으로 이 과정을 똑같이 겪게 됩니다. 인생의 여정이지요. 나무에는 뿌리와 줄기가 있고 잎이 달려 있듯이, 나무에서 자라난 잎사귀인 자녀들은 줄기와 뿌리인 부모님이 계셔 존재의 의미와 원천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뿌리 없는 나무가 살아가나요? 할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힘들기 보다는 뿌리가 있다는 존재감에서 삶의 충만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할 겁니다” 충고인지, 위로인지를 하면서도 할머니의 눈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어 나는 고개를 떨군다. 의사의 제일 중요한 목표와 의무는 환자의 진통, 즉 아픔을 없애주는 것인데 이것조차도 다 해드릴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고 체념이다.
고통 속이지만 미소 띤 인사를 남기고 나가시는 뒷모습에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누군가 그랬지, “나이 드는 것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고. “단풍이 잘 물들면, 웬만한 꽃보다 더 아름답다”고. 그리고 나이 드는 것을 등산에 비유하며 “오르면 오를수록 숨은 더 차오지만 시야는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고. 육체의 쇠약에 영혼의 힘을 보태 준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계절을 다 통과한 노년에는 젊은이들이 따라올 수 없는 깊은 미소와 고통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 보다 많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너그러운 마음, 넓어진 포용력 속에 육체의 노쇠를 상쇄시키는 그 어떤 힘이 생성되어 지는 것 같다.
지팡이에 의존한 다리를 끌며 뒤뚱뒤뚱 나가시면서 닫은 하얀 문을 한참 쳐다보다가 문득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다.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다.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피할 수없는 삶의 여정을 운명으로만 받아들여 비관적으로 나약하게 주저앉지 말고 현재를 힘차게 헤쳐 나가라고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말한다. “아무리 즐거워 보여도 미래는 믿지 마라. 죽은 과거는 죽은 채로 묻어 버려라.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지금 행동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행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움직여라. 안에는 마음이, 머리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 이런 충고가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자세에 향기와 힘을 부여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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