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열리는 학회 미팅으로 지난주 시카고 출장을 다녀왔다. 학회 출장 기간에는 많은 일들이 아주 다양하게 집중적으로 일어난다. 미리 정해진 학회 일정 이외에도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일과 관련된 새로운 주제를 위한 모임, 공적 사적 네트워크를 위한 만남들을 끊임없이 갖는다. 곳곳에서 모인 이들과 지난 일년 간의 일들을 업데이트하고 서로의 회포까지 풀기 위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갠다. 마치 이번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못 볼 사람들처럼 말이다.
게다가 어쩌다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방문한 도시를 느끼기 위해 박물관, 미술관, 맛집 등 그 도시의 명소, 명물들을 찾아 나선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도 잠들기 전까지 룸메이트와 무슨 얘긴가를 소곤거린다. 돌아오는 비행기 편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 앞에 도착해서야 마침내 오롯이 내게 집중을 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 동안의 시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하나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동안 일 욕심 사람 욕심 관광욕심을 많이 자제해왔음에도 머릿속에 펼쳐지는 이번 일주일의 파노라마는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시카고가 익숙한 도시인 때문이기도 하다. 한참을 이런 저런 순간들과 생각들이 두서없이 등장하다가 어느새 도드라지는 생각들이 나타나고 여러 기억들이 서로 고리를 연결하며 생각을 만들어나간다. 이번의 경우는 ‘흔적’이라는 단어에 생각들의 초점이 맞추어져 갔다.
얼마 전, 한 친지가 정말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상황이 남달라 수습절차도 어려운 점이 많은 경우였다. 이 충격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시카고로 떠났고 며칠 후 루프트한자 소속 저먼윙스 비행기 사고의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부기장의 고의적인 추락, 혹은 동반자살이라는 엄청난 보도에 모두들 망연자실했고 어느 한 모임에서는 그 비행기의 승객들처럼 황망하게 떠나간 주위 사람들 얘기가 이어졌다.
떠나오기 전 친지의 일로 나도 이야기에 동참을 했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남겨진 이들에게는 너무 갑작스러워 더욱 안타깝고 아쉽고 슬픈 사연들이었다. 어느 날 어떤 사람들은 연기처럼 그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그들의 온갖 흔적들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짓눌려 있는 듯 했다. 죽음은 모두에게 예정돼있고 죽음 후에 삶의 흔적들이 남기 마련인데 왠지 이 흔적들을 감당해야 하는 남은 이들의 무게가 새삼 내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순간 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죽음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떠난 이의 흔적을 해결해야 하는 남은 자의 입장이 절실했었지 싶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역시 가까운 친지를 상실했을 경우로 이해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죽음을 맞이하는, 다시 말해서 흔적을 남겨야 하는 입장에서 그것도 ‘나’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직접 대입해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갑작스러움의 정도를 강화시켜서 말이다. ‘내가 내일 아침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 상상이 정말 남의 일 같지 않게 다가왔다. ‘이 공간에서 나만 지워버린다면?’-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상실의 슬픔으로 힘들 이들에게 수습하는 어려움까지 몽땅 남겨주게 되는 것이다. 입으로야 준비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짚어본 기억이 나는데 실제로 해놓은 것은 하나도 없다.
시카고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이 이번처럼 대단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양한 울림을 선사했을까? 이들처럼 세기를 대표하는 흔적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남겨질 내 흔적 중 내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차근차근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단 죽음을 향해 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암울해 하지 않고 살아있는 이 순간을 만끽하며 말이다. 이 모습도 내 흔적임을 기억하며 말이다. 다른 일들처럼 어느새 또 잊어버리곤 하겠지만 이번 일은 잘 해야 할 것 같다. 아니 잘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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