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는 눈 고을이다.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내리며 사계가 분명하여 멋이 있는 도시다. 시카고에서 몇 십 년을 살다가도 노년이 되면 추위를 피해서 따뜻한 고장으로 떠나는 분들도 계신다. 그러나 끝끝내 여기서 살겠다는 노년들도 의외로 많다.
시카고의 겨울 구름은 보통 구름보다 솜덩이 같은 눈을 듬뿍 품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희부연 친숙함이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서 겨울 하늘을 우러르며 즐긴다. 축복처럼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나를 철없는 어린애로 만들어주고 즐거운 겨울을 살게 하는 요소가 되곤 한다.
지난 1월31일에는 사방에서 들리는 폭설 주의보로 귀가 따가웠다. 눈이 10인치 내지 18인치가 올 거라는 예보로 약간의 두려움이 섞인 뉴스가 모두를 긴장시켰다. 철딱서니 없는 나는 “기막힌 장관을 기대하시라”로 비밀스러운 내심을 숨기고 있었다.
기막힌 천지창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상과 어떤 원시적인 묵묵함이 현대의 소란함과 어우러지는 설경을 보겠구나 하면서 좀 설레었다. 한편으론 비행기 사정으로 불편을 겪을 여행객을 염려하는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의 하얀 세상은 모든 것이 찐 빵처럼 부풀어 새 얼굴이 되어 있었으니 과분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함박웃음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밖을 내다보았다. 누구도 밖에 나갈 수 없다는 단절감이 왜 그렇게도 오붓하던지.
폭설폭풍 주의 예보가 맞아떨어졌다. 하얀 바람이 몸부림을 쳤다. 바람의 정체가 보이는 순간이었다. 갈 길이 막힌 전쟁용사들의 마지막 분노 같기도 했고 보이지 않는 영혼의 탈바꿈 같기도 했다. 영혼의 빛깔은 저런 것일까, 희디 흰 분말이 노하는 모습에도 으르렁거리는 위력이 보였다.
자연현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신비로움, 이런 장관은 오직 오늘 하루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종일 뒤뜰을 향한 통유리 창으로 장엄한 눈보라의 소용돌이를 지켜보았다. 눈 고을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우리 파킹장에 지천으로 쌓인 눈을 제설차가 억척스럽게도 한곳으로 밀어 붙이는 바람에 거대한 눈 무덤이 왕릉의 일부 같았다.
세상에 없는 새로운, 철저하게 하얀 요소로만 지어진 듯한 눈 동산은 매서운 바람에 녹을 줄을 몰랐다. 노리끼리한 겨울 햇볕이 몇 시간 비치다가 그 위로 다시 눈이 쌓이고 녹다 얼다 몇 번을 반복하다보니 얼음산이 되었다. 2월 한달 내내 녹을 줄을 모르는 겨울이 꽁꽁 뭉쳐 있었다.
그들은 더욱 견고하고 알찬 화합을 다지고 있었으니, 위로 쌓여가면서 엉켜있는 저 생생한 날 것들, 고체가 되어있는 저희들끼리는 오붓한지, 나는 그 얼음더미에 살며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심장까지 얼게 할 것 같은 냉기가 얼굴을 확 감쌌다.
추위에도 서로 애틋한 소리로 속삭이는 듯했다. 몇 켜의 눈과 얼음이 이질감도 없이 부둥켜안고 있는 그들에게는 강한 결속력이 있었다. 삶의 결이 평화스럽게 동화되고 있는 자연의 모습 앞에서 가뭇없이 돌아서는 생명 있는 자로서의 내 서먹함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쩐지 눈과 얼음의 밀착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 모양 그대로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어느 날 쉬 녹으리라.
드디어 3월 중순, 포근한 주황색 햇빛이 찾아 들자 얼음산의 높이가 낮아지면서 바위 같은 얼음더미 밑에서 맑은 물이 갓난이 미소처럼 작은 줄기를 지어 흐르고 있었다. 경사진 곳을 찾아 흐르는 물은 파란 맥박이었다. 실타래 같은 모양으로 결 지어 흐르는 여리고 여린 생명감이 하도 신기해서 나는 한참이나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그것은 야들 거리는 어린 풀잎일수도 있고 겸손하게 알리는 봄의 소식이기도 했다. 딱딱한 얼음이 낳은 맑은 물, 그것은 또 다른 탄생이다. 사람 사는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고 세상을 껴안는 온기였다.
세상은 고독이 아니고 고립이 아니다. 소멸하고 생성하는 연합의 미학을 보았다. 이 정결한 해동의 봄을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다. 냉동됐던 것이 부드럽게 녹는 날, 나는 두 팔을 높이 펴들고 봄을 마중하리라. 그리고 봄을 나누어 갖자고 벗님네들을 불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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