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윤 / USC 동아시아 도서관 한국학 사서
어릴 적 만화를 무척 좋아했었다. 언니 오빠들 덕에 또래의 다른 아이들보다 더 심취할 수 있었지 싶다.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도 만화가 항상 주위에 있었고 초등학교 들어가서 부터는 만화방 심부름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언니 오빠들의 연령차 그리고 각각의 취향들 덕분에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작가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심심치 않게 당시 만화들과 함께한 추억들이 떠오른다.
2000년 새해가 되었을 때부터 가끔 떠오르는 공상과학 만화의 한 장면이 있다. 공상만화는 둘째 오빠의 영향으로 조금 섭렵한 것뿐인데 신기하게도 가장 오래 내 기억을 차지하고 있다. 2000년 세상을 배경으로 한 내용으로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하늘에 집이 둥둥 떠 있는 장면이다. 완전 하이텍 세상이지만 모든 것이 공중에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아주 평화로운 느낌이다. 하이텍 낙원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 장면과 함께 항상 등장하는 추억이 있다. 친구들이랑 이런 미래의 시간을 살고 있을 본인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장면이다. 뽀골뽀골 빠마머리와 퉁퉁한 몸매가 모두에게 떠올라 서로 찡그리며 깔깔거리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가까이 있는 아줌마인 엄마를 조금 뽀샵 처리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느덧 그런 2000년이 15년이나 지나 2015년이 되었다. 나는 상상의 내 모습보다 당연 더 늙어있고 세상은 지속적으로 하이텍이 되어 왔지만 평화로움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깨져 가는 듯하다.
지난 7일 복면 괴한들이 중무장을 하고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엡도> 사무실을 급습, 이를 시작으로 3일 동안 프랑스에서는 악몽의 테러가 자행되었다. 2014에서 2015로 시간표현단위의 일부분이 바뀌었다고 해서 어제의 연속인 우리들의 세상이 기적처럼 돌변하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초부터 들려오는 이 잔인한 소식은 너무도 여전하다 못해 더욱 새로워 절망스러웠다. 게다가 정신병자의 충동범죄와는 구별되는 계획적인 테러였다는 점이 더욱 아연실색케 했다.
몇 년 전 박경리 소설가의 유고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접한 <확신>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너무 공감되는 그 시의 일부이다.
“많은 것을 예로 들자면/ 끝도 한도 없는 시절이지만/ 그 중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 확고부동하게/ 옳다고 우기는 사람 참 많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늘어나게 되고/ 사람은/ 차츰 보잘 것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구의 뭇 생명들이/ 부지기수 몰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땅도 죽이고 물도 죽이고 공기도 죽이고/ 연약한 생물의 하나인 사람/ 그 순환에는 다를 것 없겠는데/ 진정 옳았다면 진작부터/ 세상은 낙원이 되었을 것이 아닌가/ 옳다는 확신이 죽음을 부르고 있다.”
끊임없는 생각과 가치판단과 경험 등이 축적되어 우리 각자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치열하게 현재에 이른 개개인의 인생들인데 얼마나 본인만이 옳으면 남의 생명에 이렇듯 가차 없을 수가 있을까?지금 이순간도 이와 비슷한, 더 할 수도 있는 참사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낙원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이런 희생이 없는 세상은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살수 있다’는 메시지들이 사건 이후 줄곧 뉴스에 등장하고 이를 보여주기 위해 수백만의 인파가 행진에 참여했다. 그나마 걸어 잠궈 버릴 것 같던 희망의 문이 조금은 열리는 듯 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계속 열어나갈지 마음이 조마조마 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과 마음에 직접 상처로 새겨져 있는 일이 아니기에, 내게서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사건이 내 머리를 휘젓고 있을 것이다. 문득문득 운이 좋은걸 감사하며 말이다. 그래도 이것 한 가지는 잊지 않고 더 노력했으면 싶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일이 있다면 그 확신에 한번 더 겸손하고 한번 더 확인해 보고 싶다. 확신이라는 돌다리, 잘 두들겨 봐야 겠다. 나만 건너는 돌다리가 아니라면 더욱더 확실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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