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윤USC
▶ 동아시아 도서관 한국학 사서
12월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나를 살피게 하는 달이다. 올해도 예외 없이 일년을 단위 삼아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에 놓인 시간들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있다.
누가 작년 12월의 나와 올해의 내가 달라진 점을 묻는다면 12월을 맞이하고 있는 나 자신의 마음상태를 먼저 얘기할 것 같다. ‘12월’ 하면 괜히 마음이 바빠지고 이 부산한 마음을 당연시한 기억이 있다. 마치 세월에 진 빚을 갚아야 하는 빚쟁이 마냥 빚 청산에 쫒기는 마음 비슷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르다. 여느 12월처럼 바쁘고 바빠져야 하지만 마음은 바쁘거나 당황스럽지가 않다. 일이 많아지니 계획이 꼬이는 경우는 더 늘어나는데도 말이다. 어느 날은 행사에 서둘러 나서야 하는데 ‘옷장에서 저절로 줄어든 옷’들이 많아져, 연말 파티용 옷마다 몸에 맞지가 않았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발을 동동 굴렀을 여러 일들을 덤덤하게 그리고 적당히 잘 넘겨가고 있다.
12월에 대한 자세가 바뀌었다고나 할까. 그 동안 12월에 너무 많은 의미와 무게를 부여해온 듯 했다.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고 그 성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래서 당연히 바빠야 하는 시간으로 말이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 그리고 달력의 시간 개념과 단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있었다.
올해 초 페이스북에서 과학책 읽는 모임에 가입한 것을 시점으로 학교 졸업 후 완전 문외한으로 지내던 과학 분야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덕분에 ‘신의 입자’나 ‘빅뱅’ 등을 외래어 취급하던 수준을 겨우 면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코스모스>다큐멘터리를 13편으로 제작, 방영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코스모스>는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대중에게 천문학을 소개하기 위해 쓴 저서. 이번 다큐멘터리에는 칼 세이건의 후계자라 불리는 우주 물리학자 닐 타이슨이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며 과학자들의 노력과 그 결과의 힘에 새삼 놀랐다.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과 함께 많을 것을 배웠고 우주의 공간 시간 개념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다름 아닌 ‘우주달력’이었다.
빅뱅 이래 현재까지의 시간은 136억년. 너무 어마어마해서 머리에 그려지는 숫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상상 불가한 시간을, 빅뱅 이래 현재까지의 우주역사를 일년으로 환산하고 정리하여 우주달력을 만든 것이다. 빅뱅으로 한 해를 시작한 우주 달력에서 태양계는 9월에, 그리고 마지막 날인 12월31일에야 인류조상이 등장한다. 이 우주달력에 의하면 12월31일 마지막 47초를 남기고 빙하기가 발생하고,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마지막 1초를 남기고 발견하게 된다.
이쯤 되면 이 달력에서 나의 존재와 시간은 어떠할 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엔 이곳에 점조차도 찍을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존재가 먼지처럼 소멸되는 듯 했다. 하지만 달력 전체를 보는 순간 이 달력에 그려진 우주탄생과 우주역사의 현상들을 증명해가며 그 엄청난 시간과 공간에 함께 하고 있는 우리들의 존재 하나하나가 빛나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흥분의 순간이었다.
아마도 그 이후 우주 달력은 내 머리에 상주하게 된 듯싶다. 그래서 가끔 내 앞에 놓인 시간과 사건들을 우주달력에 입력해 보게 되는 것 같다. 우주의 시공간에서 내 삶의 몫을 생각해보면 거의 ‘무’에 가깝지만 이런 삶들의 자취로 우주달력이 만들어졌고 그 위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는 것을 상기하곤 한다. 이 거대한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내 삶에 가슴이 뻐근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다 보면 쓸데없이 붙들고 있던 소소한 시빗거리들이 어느새 꼬리를 감추고 문제들이 해결점을 찾아가는 것을 본다. 이 우주달력 덕분에 12월이라는 시간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졌지 싶다. 시시비비에 휘말리지 않고 저축한 에너지로 인해 주위를 돌아보는 일이 전보다 쉬워졌으면 싶다.
나이 들수록 추위에 민감해지고 연말이 추운 겨울이니 추운 삶에 점점 더 마음이 쓰인다. 일단 주위부터 좀 훈훈하게 해보자. 미미하지만 이런 마음들이 모여 발휘하는 힘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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