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윤 / USC 동아시아 도서관 한국학 사서
얼마 전 인터넷에서 노후에 관한 글을 읽은 후부터 자주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유병 무전 장수’ 아마도 꽤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말장난 같던 백살 세대가 남의 일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에 부쩍 노년에 마음이 쓰이던 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동안은 신조어 수준으로 가볍게 넘겼던 장수에 관련된 단어들이 이 글에서는 아주 생생하게 제대로 그 뜻을 전달해 주었다. “노후에 가장 무서운 건 ‘유병 장수’이고 그보다 심각한 건 ‘무전 장수’이며, 이보다 더 심각한 최악은 ‘유병 무전 장수’ 이다.”
그 동안의 직접 간접 경험들 덕에 이 문장에 내 자신을 대입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오래 사는 것이 결코 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이 공감과 함께 오는 두려움이 쉬이 내쳐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노후의 안녕과 관련해서 쇼킹한 뉴스가 있었다. 벨기에 노부부의 동반 안락사 뉴스다. 80대 후반의 부부가 결혼 64주년 기념일인 내년 2월3일에 동반 안락사를 계획한 것이다. 평소 부부 모두 건강 문제가 있기는 했으나 이들이 동반 죽음을 택한 이유는 건강 때문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사망 후 남겨진 배우자가 맞게 될 외로움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3명의 자녀들도 부모의 동반 안락사 계획을 받아들였고 결국 한 병원 의사로부터 안락사 허락을 받았다. 이 결과에 이들은 “마치 터널을 빠져 나와 다시 빛을 보게 된 기분”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안락사’는 내게도 전부터 관심이 가던 이슈다. 의학의 발달과 함께 생명연장 기술이 향상되자, 의미 없는 수명 연장에서 벗어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편안하고 행복한 죽음에 대한 인간의 선택권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라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지속적인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인터넷에서 쉽게 그 논란의 쟁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생명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치료를 중단하는 안락사의 방법이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약물들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환자의 자발적 선택에 의할 수도 있지만 가족의 요구 혹은 국가의 요구에 의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복잡하게 생명과 관련된 일이기에 조심스럽고 논의가 뜨거울 수 밖에 없는 주제이다.
이런 안락사의 옵션이 노후를 생각하면 막연히 불안한 내게 안도감을 주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위한 처방일 것이다. 그렇다면 보통 노년의 시간을 위한 처방전은 과연 무엇일까.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는다. 강도나 진행속도는 닥쳐봐야 안다. 다들 갈수록 빨라진다고는 한다. 그래도 앞으로를 계산해 볼 수 있을까 해서 지난날들을 떠올려보려는데 그냥 멍하다. 내가 겪은 그 많은 시간들이 애써 노력해야 겨우 조금 떠올려 진다. 한달 전 아주 신나게 다녀왔던 3박4일 여행에 대한 기억이 고작 한 시간 길이나 될까?
내 머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노벨상 수상자인 대니엘 카네만 교수가 얘기하는 경험과 기억의 논리처럼 매 순간 경험하는 것들 중 아주 일부분만이 기억에 기록되는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은 길어 보이는 노년도 막상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경험을 기억으로 선택하는 일에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미래의 모든 경험의 순간에 내가 행복으로 기억하는 것들에만 계속 집중한다면 내 행복 기억 데이터베이스는 더욱 강력하게 쌓일 것이고, 노후의 단단한 버팀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유병 무전 장수’에서 문제되는 건강과 돈이 많이 취약해도 이겨나갈 수 있는 나만의 처방전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은 닥쳐봐야 아는 일 같다. 만만치 않아 보이는 노년의 세월을 씩씩하게 보내고 계시는 많은 분들과 그분들을 곁에서 돕고 계시는 분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모든 회한이 다 승화되는 멋진 노년의 시간을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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