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가 벌써 치열한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맞고 있다. 삭막한 겨울이 닥치기 전, 지난 16년간 온 정성을 바쳤던 멕시코 의료봉사를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기 위해 현지를 다녀왔다. 현장을 안내하고 소개해준 마지막 방문이었다.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항상 보아왔던 정경들이 펼쳐지며 그간의 추억들이 어우러져 떠오른다. 게르모의 얼굴표정도 보인다.
게르모를 처음 만난 건 12년 전, 그는 풋풋한 22세의 과묵하고 건장한 현지 원주민 청년이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는 순수하고 성실하며 남을 돕는 성품으로 우리의 동역자가 되었다. 자신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자부심에 그는 지난 12년간 기꺼이 우리와 함께 봉사의 현장에서 땀을 흘렸다.
그 외에 2명의 현지 원주민 청년들도 함께 일했다. LA에서 떠나는 봉사의 동반자들은 항상 바뀌었으나, 현지 원주민인 이들 3명은 흐르는 긴 세월 속에 항상 함께 있었다. 가난하고 많이 배운 것 없는 청년들이었으나 순박하고 정이 많았다. 상대를 평가하는 기준도 순수했다. 약속, 신의를 지키고 진실함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품위를 갖춘 상대를 그들은 존경하고 따랐다. 학력이나 지위, 재력이나 국적은 그들의 가치 기준이 아닌 듯 했다.
매번 일정이 끝나는 마지막 날 난 이들과 그 가족들을 숙소에 초대해 저녁식사를 하면서 “너희와 우리는 한 형제야, 그리고 나는 너의 형이지” 했고 (실제는 아버지뻘이다) 때론 그들의 인생 상담자가 될 정도로 스스럼없이 식구 같이 가까이 지냈다.
봉사 초기에, 같이 가기로 했던 일행이 출발 며칠 전에 약속을 취소해 피치 못하게 혼자 간 적도 있었다. 환자들과의 약속을 지켜야했기 때문이었다. 현지에서 도와주는 그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언젠가는 새벽 5시 동트기 전, 게르모가 곤히 잠든 나를 깨웠다. 두개의 낚시 대를 빌렸다며 내민다. 같이 낚시를 하자는 것이다. 잠을 더 자고 싶었다. 그러나 혼자인 내가 외로워 보였는지 위로자(?)가 되려는 그의 착한 심성에 할 수 없이 끌려갔다. 내가 낚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나온 그는 새벽바다에 같이 낚시 대를 드리운 지 한시간만에 자기는 식당 웨이터로 일하러 가야된다며 정오에 그의 가족, 친지들을 합류시켜 봉사 현장에서 만나자고 했다.
함께 갔던 한 의료봉사 대원은 그에게 교회에 가라고 전도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라고 전했다. “나는 마음속에 확실히 예수님을 모시고 있어요. 교회 가는 대신 닥터 최와 함께 이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떠나는 날 아침 게르모를 조용한 현관 옆방으로 불러 말했다. “항상 나에게는 육체적인 피로와 부담이 있었다.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왕복 20시간의 트럭운전, 사전준비, 무거운 구제물품, 차량관리 등에서 오는 피로와 일정의 책임을 감당하기에는 이제 나이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번에 같이 온 조그마한 교회의 사람들이 이 일을 이어 받았으니 이들에게도 가족처럼 성실하고 진실하게 도와주기를 바란다”
10여년 오래 같이 봉사했으니 이제 당신이 떠나야한다는 걸 잘 알겠다고 대답하는 그의 손에 500달러를 꼭 쥐어주었다. 받지 않으려고 한다. 전에는 10달러만 쥐어 주어도 그렇게 좋아하던 그였는데 “왜 이런 것을…” 하며 서먹해 한다. 그간 10년 넘게 같이 일했던 ‘바하 힐링미션’에서 주는 작은 우정의 표시라고 했다. 그의 굳은 표정, 충혈된 눈동자를 나는 더 이상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방문을 열면서 “아마도 이곳 정들었던 아름다운 바다를 나는 다시 그리워 할 것이다. 언젠가 이곳을 자연인으로 방문하게 될 거야” 라는 말을 뒤로하며 떠났다.
돌아오는 길, 생각을 정리해 본다. 그동안 쏟았던 에너지를 다시 갖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해가 저물기 전 하얀 뭉게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처럼 가을을 맞은 나의 생에도 아름답게 황혼을 장식할 시간이 조금 남아있을 것이다. 앞으로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차에서 내려 가벼운 발걸음으로 얼마 전 손을 다친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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