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임금의 시 “관산의 달을 보며 통곡하노라..”임금 선조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웬 계집아이가 볏단을 머리에 이고 대궐에 들어왔는데, 볏단을 내려놓지 마자 불길이 하늘을 찌를듯 높이 솟구치고 불이 번져서 궁전을 태우는 것이다.
선조가 놀라 깨어 꿈 이야기를 하니 어느 신하가 해몽을 하였다. 사람 인 변에 벼 화(禾)를 계집아이(女)가 머리위에 이었으니 바로 왜(倭)라는 글자라. “가까운 장래에 왜란(倭亂)이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하여 궁전이 불 탈 것입니다.” 이것은 정사에는 없고 다만 민담(民譚)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이런 류의 민담은 또 있다. 선조의 꿈에 어느 큰 나무 위에 사람들이 많이 올라 있는데 선조 임금 자신도 그 나무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던 중 바다의 큰 물결이 갑자기 휩쓸어 와서 나무를 쓰러뜨리려 하는데 그 와중에서 어떤 사람이 나무 둥지를 떠받쳐서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겨우 면하게 하였다. 그사람이 누군가 보니 얼마전에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발탁한 이순신이였다.
조선 개국이래 최대의 국난이였다는 임진왜란은 갑작스럽게 당한 난리가 아니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공식 비공식 루트를 통해서 일본의 조선 침공이 가까운 장래에 있을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허실을 파악하도록 했는데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의 보고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이다. 어전회의에서 서인으로 분류가 되던 정사 황윤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옵니다”하고 일본의 침략을 예고하였으나, 부사로 갔던 동인의 김성일은 “전혀 그런 조짐이 없사옵니다”하고 상반된 대답을 하였다.
국가안보 보다 자기 당리(黨利)가 우선이다 보니 옳건 그르건 간에 상대당의 주장은 반대부터 하고 볼 일이다. 왜란이 있기 10여년 전 당시 병조판서 율곡 이이가 조선의 각 지방관아를 돌며 국방태세를 점검하였다. 율곡이 보니 성(城)은 곳곳이 무너졌는데 성곽보수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고, 무기는 녹이 슬어 거의 못쓸 지경인데 그나마 군사는 명부에만 있을 뿐 실제는 없다. 이거 큰 일이다 싶어 <10만 양병설>을 제안하였으나 정치권에서 토론만 무성하다가 “민심을 동요케하고” “국가 재정을 낭비”한다는 이유로 무시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전까지 나라 정치의 최대 이슈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정여립의 난>이 있다. 요즘같으면 증거 불충분으로 무협의 판결이 내릴 수 있는 사건이지만 정여립이 당파로 동인(東人)에 속했었기 때문에 반대 당파 서인(西人)은 사건을 부풀려서 역모로 몰아세웠고, 동인들은 “아니다”라고 맞섰다.
그러나 사건은 기축옥사(己丑獄事)로 발전해서 정여립과 서신 교환이라도 있던 선비들이 연줄연줄 화를 입었는데 그 숫자가 천 여명에 달했다. 조사 책임자는 서인 정철이었는데 ‘분명치도 않은 사건’에 연루자들을 너무나 과혹하게 고문을 했다고 해서 이것이 또한 정치문제가 되었다. 세자의 건저(建儲) 문제도 있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정철이 선조에게 둘째 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주청을 했으나 선조는 “내 나이 마흔도 안되었는데’ 세자 책봉을 운운한다면서 크게 화를 내고 정철을 귀양보낸다.
사실 선조는 광해군보다 그의 배다른 동생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서인 정철이 실각을 하자 이번에는 동인들이 들고 일어나서 서인을 공격하는데 이것은 지난 정여립의 난으로 빚어진 기옥축사의 보복이기도 했다. 동인 내부에서도 정철을 “죽여라” 는 강경파가 북인으로 분류가 되었고 “그럴 필요는 없다”는 온건파는 남인으로 나뉘었다. 하여간 대란을 코 앞에 둔 그 시절, 국내정치는 당파 싸움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592년 3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15일 만에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을 간 선조 임금은 처절한 심정으로 다음의 시를 지었다. “관산의 달을 보며 통곡 하노라(痛哭關山月) 압록강 바람은 마음을 상케 하는구나(傷心鴨水風) 조정 신하들아 금일 이후에도(君臣今日後) 어찌 다시 동서분당 싸움질 하겠느냐(寧復庚東西).” 이후 7년이나 계속된 임진왜란으로 조선 인구 전체 5백만 중에 1백만이 사망했고, 농경작지는 66%가 황폐화 되었으며, 숱한 문화재가 파괴되고 약탈되었다.
요즘 한국에도 세월호 특별법을 놓고 국회가 마비되고 민생법안이 표류되고 있다. 북에선 핵을 쥔 어린 ‘지도자’가 이제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데도 국가안보에는 모두 뒷전, 국민 모두 강건너 불보듯 태평하다. 대한민국 경제력이 세계에서 열 몇번 째라고 자찬들을 하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취약한 구조위에 세워진 것인지,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자원경쟁, 기술경쟁, 시장 경쟁은 또 얼마나 치열한지를 모두 알면서도 애써 눈을 가리고 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그 혹독한 시련을 되풀이 되기 마련이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을 겪은지 44년 만에 겪은 또하나의 참상이였다. 임진왜란사를 다시 읽으며 오늘날의 조국 현실을 우울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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