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두개를 들고 학교 캠퍼스 내의 학생 아파트에 자리 잡은지 며칠뒤 한국 떠날 때 우편으로 부친, 잡동사니 상자가 도착했다. 배달해준 우체부가 세금으로 삼불 몇십전을 내란다.
상품도 아니오 내 속옷이나 헌책인데 무슨 세금이냐고 하니 자신은 그저 받아가야 할 뿐이라고 억울하면 여기에 편지를 쓰라고 주소를 두고 갔다. 그 당장으로 항의 편지를 쓰자 며칠 후 삼불 몇십전의 수표가 왔다.
이 나라는 정말 좋은 나라구나. 사람에 대한 신뢰가 있구나. 한국에 살 때 나는 상점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심부름으로 두부 한모를 사려거나 달걀 한줄을 사려해도 귀신같은 상인들은 나의 어리숙함을 담박에 꿰뚫고 꼭 상한 물건을 내주곤 했다. 옷을 맞추면 분명히 안맞아 고쳐줘야 하는 사정인데도 죽을 기를 쓰고 그게 맞는 거라고 우겨 영악한 상인들을 이겨낼수 없는 나는 눈 뜬채로 코 베어가는 꼴을 숫하게 당하고 살았다.
미국을 동경한 많은 이유중의 하나가 사회가 갖고 있는 모든 구성원에의 전반적 신뢰였다. 최근 전화가 고장 났다. 하도 소리가 울리고 접속이 됐다 안됐다 해서 통화 하는 사람들 마다 불평이 대단했다. 가게에 가서 상황설명을 하니까 한번 어디든 통화 해보자더니 자기들이 보기엔 말짱 하다는 거다. 무언가 부품을 하나 바꿔주고는 일주일만 써보고 그때도 여전하면 바꿔 주겠단다.
일주가 지나도 상태는 여전했다. 가게엘 갔더니 무슨 전화번호 하나를 던져주고는 그쪽과 해결해 보란다. 내 전화는 보험이 있으므로 이상이 있으면 바꿔줘야 한다. 그런데 받아온 전화번호로 간신히 담당자라는 이와 접속이 됐는데 목숨을 걸고라도 새것을 내주지 않으려는 각오가 여실하다. 아아! 한국에서 그 영악한 상인들의 태도가 도저히 감당안돼 이곳으로 옮겨온 후, 이것이 이러저러하다는 말을 하면 거의 모든 곳에서, 모든 상황에서 내 말을 믿어주는 그 신뢰감 하나 때문에 사는 게 좋구나, 하는 마음이 많이 들었었는데 이제 이곳도 맛이 갔구나, 감당 안되는 이 영악한 사회를 내가 무슨 수로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전화를 쓰지 말고 말지. 하긴 내겐 오는 전화도 별로 없다. 기껏해야 전화번호부로나 쓰고 옆집의 아들에게 손자를 데려오라니 데려가라니, 하는 정도의 용도 밖에 없으므로 전화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밖에 나가보면 모든 사람들이 스마트 폰을 들여다 보느라고 눈에 들어오는 게 없는 모양들이데, 도대체 무슨 비지니스가 그리도 바쁜 것일까? 한참 전 부터 나는 워드 프로세스로 원고를 쓰는 외엔 인터넷도 보지 않는다.
인터넷에 한번 들어 갔다가 낚시성 제목 때문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 보면 한두시간은 순식간에 달아나는데 언뜻 시계를 바라보고 내가 쓴 그 헛된 시간을 떠올리면 마치 영악한 상인들에게 앉은 자리에서 코 베인 꼴 같아져 불쾌하기도 하고 억울해서 금쪽같은 내 시간 돌려도! 하고 아무나 붙잡고 떼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 정원에서 흙일 하는 것, 손자와 노는 것, 동네 한바퀴 도는 것, 그것 외에는 이제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무슨 일만 있으면 대뜸 사진 찍으려고 스마트폰을 꺼내드는 사람들을 보면 저 많은 것들을 찍고 나선 어떻게 할까 싶다. 나는 이제 사진도 안 찍는다. 아니, 있는 사진도 버리려 한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맘으로 한번 그리워 하고 걱정되는 이가 떠오르면 묵주기도 한번 돌린다. 그대신 모르는 이에게라도 될수 있는데로 친절하려 한다.
최근 어떤 이가 내가 대단히 냉소적인 사람인 걸로 아는데 누굴 만나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반긴다며 혹 이중인격자가 아니냐는 식의 질문을 했다. 모든 이가 자신이 생각하는대로, 자신이 보는 대로 해석하는 게 사실이구나 싶었다. 풀 한포기 없이 흙먼지 풀풀 나는 산길을 가다 엉겅퀴 한그루 꽃 피고 있으면 측은하고 반갑고 예쁘다. 비록 엉겅퀴 꽃이 예쁜 장미는 아닐지라도.
다 부서지고 망가진 콩크리트 사이에 민들레 한송이 비집고 피어 있으먼 그 생명이 애처로와 민들레도 예쁘다. 나이가 먹어서인지 앞자리에서 박수 받는 잘난 사람보다 그냥 조촐히 제 자리에서 제 꽃을 피워 낸 이가 예쁘다.
그 사람이 내게 한달을 함께 여행 하자면 다른 이야기 이겠지만 그냥 오랜 만에 우연히 만나 여전히 성실히 사는 모습을 보면 호들갑스러운 내 표현이 싼티가 날지는 몰라도 정말 반가운 건 사실이다. 암팡진 세파에 수수한 사람을 그리워 하는 그 여자의 사는 법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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