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잔치는 끝났다. 그것도 아주 풍성하게 말이다. 내 초등학교 2,3학년 시절, 운동회와 소풍날을 하루 앞둔 날 밤, 나는 우리집 앞 뜰에 나와, 바닷가 모래알처럼 하늘 바다에 흩어 놓은 별 중에, 가장 큰 별 하나에다 대고, 내 송이버섯 같이 포송포송한 두 손을 모으고는, “하나님, 제발 내일 비 오지 말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의 별빛을 보아 비올 기미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로부터 70여년의 세월이 흘러, 그 꼬맹이가 여든 다섯 살의 할아버지가 된 저 지난 달, 겁도 없이 그의 다섯 번째 수필집 ‘추억의 강에 띄우는 쪽배’의 출판기념회란 잔치 날짜를 잡아 놓고, 그 옛날 그 꼬맹이 소년이 그랬듯이, 이민땅 그의 집 뒷뜰에 나와, 수세미 같은 두 손을 모으고는, 그의 수필집 제목과 비슷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의 그 은하수강을 바라보며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주기를 빌었었다.
세상 사는 인심이란 겨울철 강물처럼 차가운 것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만 않은 듯, 독립기념일을 며칠 앞둔 주말인 6월 28일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뒤엎고, 식장인 산장식당 별관 120석을 꽉 메워 주었다.
그러한 성황은, 내가 이 바닥에서 펼친 연극 무대와 이 ‘수필산책’란을 통한 글이, 나같은 이민세대에게 다소나마의 위로가 되었던 그 보상의 되돌아옴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뿐 아니라, 나의 이번 잔치를 주최해 준 한국일보사의 지면을 통한 기사와 ‘알립니다’란과 5단광고를 통한, 애독자들의 참여를 바랐던 게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식은 명사회자로 알려진 이민규 한국일보 사업국장의 개회선언으로 그 막이 올라갔다. 개회기도와 개회사, 그리고 두 분 축사자들의 나에 대한 찬사는, 내가 외길(연극과 집필) 60여년을 걸어온 그 길이, 결코 허망한 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버클리문학의 김희봉 회장의 문인의 견지에서 본, 나에 대한 평가에서 “주평선생의 글에 대한 정열과 자존심에다, 후배의 글이 발표되었을 때마다, 선배로서 직접 전화를 걸어, 격려해 주는 그 겸손한 마음가짐은, 후배들이 본 받아야 할 점이다!”라는 그의 말에 대해, 나는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그리고 내 책의 제목인 ‘추억의 강에 띄우는 쪽배’ 낭독에 나선 남중대 군의 낭독은, 나와 24년 동안이나 연극을 함께 한 솜씨답게, 극적인 낭독으로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특히 어느 날 밤 아버지께서,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친구로부터 “기수(아버지의 이름)야, 너의 큰놈 의사 만들 생각 말고, 그의 소질대로 딴따라 길로 내보내거라!”라고 한 말에 크게 충격을 받으시고는,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화살 맞은 늙은 사슴처럼 벽에 기대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는 대목에서의 극적인 낭독이 끝내 나를 눈물지게 했다.
그리고 어릴 때에 내가 보듬고 키운 외손녀 ‘하나’의, 할아버지를 위한 축하 노래는, 또 한 번 나와 참석자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나는 답사 자리에 섰다. “디스크 수술로 인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늙은이가 주책없이 잔치를 벌여 놓고, 여러분을 오시게 해서 미안합니다”라고 한 내 말에, 웃음과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 박수를 나는, 격려의 박수로 받아 들였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가 이런 축복된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시면, 틀림없이 나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또 한 번 울었다. 한편,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한 세 동생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리고, 생활이 보장된 의사의 길을 마다하고, 쪽박차기 십상인 딴따라의 길로 내달음으로써, 그들의 대학 학비조달 하시느라 고생했던 아버지를 지켜보고는, 형을 크게 원망했던 그들에게도 용서를 빌었다.
그리하여 ‘여든 다섯 살의 보람’이란 제목이 붙은 나의 답사는 끝났었다. 그런데 그 날 사회자와 축사 자리에 선 정순영 박사의 요청으로, 내 외길의 동반자였던 마누라에게 보내진 두 차례의 박수는, 바로 내가 할멈에게 쳐 주어야 했을 박수였다.
그렇게 하여 출판기념회란 잔치는 끝났다. 잔치가 끝난 후, 걸려온 전화마다 그리고 만나는 자리에서, 출판기념회 순서가 연극적으로 멋있게 짜여진데다, 잔치의 끝마무리인 음식마저도 품격 있고, 맛이 너무도 좋았다는 말들은, 집사람과 나를 어린애 같이 즐겁게 해 주었다.
내가 펼친 잔치의 성황을 축하라도 하듯 독립기념일 밤에 작열한 그 회사한 불꽃의 향연이 멎은 그 다음 날 밤, 나는 다시 내 집 뒷뜰에 나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내가 꼬마 시절에 그리고 며칠 전에 바라보던 그 큰 별과 은하수강의 별들은 그 밤도, 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수유리에서 이웃하며 살면서, 내가 주최한 아동극 경연대회 17년에서 10년 가까이 단골 심사위원이었던, ‘푸른 하늘 은하수’를 작곡하신 윤극영선생은 26년 전에 ‘하얀쪽배’를 타고, 은하수강을 건너가셨지만, 나는 그 분이 돌아가실 때의 나이인 여든 다섯 나이로, 이렇게 보람의 날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밤에 내가, 다시 저 은하수 바다를 바라보며 비는 기도가 있다면 그건, 내 인생극장의 마지막 막이, 관중들의 우레 같은 박수 속에 내려지기를 바라는 바로 그 기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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