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선윤 / USC 동아시아 도서관 한국학 사서
어릴 적 심심할 때 가끔 하던 놀부 놀이가 있다. ‘니꺼 내꺼’ 하면 그 다음은 ‘내꺼 니꺼’ 해야 맞는 데 상대방이 손 내밀고 자기 몫을 기다릴 때 주는 척 하다 상대방 것마저 내가 쓱싹하며 ‘내꺼 내꺼’ 하는 것이다. 물론 ‘모두 내꺼’를 아무렇지도 않게 실천하는 진짜 놀부들이 넘실대는 세상과는 달리, 어린 우리들 놀이세상에서는 깔깔거리며 잘 나눠먹는 것으로 끝이 난다.
모두들 알다시피, 못된 형 놀부와의 관계에서 동생 흥부는 착하고 그저 희생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리고 권선징악의 이치로 흥부와 놀부의 삶이 평정 되고, 마음씨 고운 흥부는 그래도 형을 지성으로 섬겨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당하기만 하던 흥부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힘들었던 삶이 보상되는 순간 나도 여느 아이들처럼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난 흥부전의 가르침에 뭔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었다.
혹시 내가 막내라서 동생이 당하기만 하는 설정이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기적적인 보상과 벌은 결국 이야기 속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의 착한 뒤끝은 어쩐지 불안해 보였던 것일까? 커서도 가끔은 이런 의문을 품어보고는 했었다. 오랜 세월 조용하게 마음 한구석에 묵혀두었던 이 불편함의 실체가 우연치 않은 계기로 모습을 드러냈다.
25년 전쯤 큰아이가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학교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덕에 가끔 학교생활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아이들이 줄을 서있는데 그 중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새치기한 다른 아이를 선생님께 일러바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아이들이 크고 작은 미국 시스템과 관련되면서 두 문화의 차이를 설명해야 하는 어려움에 나 스스로 답답하던 참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별일도 아닌데 가까운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고자질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주어져 내 고민을 상담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친구를 고자질하도록 가르치는 게 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때 선생님이 한 대답으로 그 동안 흥부전과 그 비슷한 이야기들과 연관되어 투명하지 않았던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은 너무도 상식적인 답이지만 그 당시 내게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주위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기가 쉽기 때문에 고자질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대답이었다. 친구가 그냥 넘어가 주는 것이 잘못한 아이에게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고, 이런 훈련이 어렸을 때부터 이루어져야 좀 더 쉽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주위의 사람들도 존중하는 법을 익혀나간다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 상대적으로 학대당하기 쉬운 약자이기에 더 철저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 내가 흥부 이야기에서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바로 이 약자 보호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구보다 한국은 나이와 지위가 권력이 되기 쉬운 문화이다. 게다가 아이들에게 가족은 선택이 아니라 태어날 때 주어지는 집단이다. 이 집단의 구성원 중 힘있는 이가 힘없는 어린 구성원에게 잘못된 권력을 휘두를 경우, 흥부처럼 그저 착하게 이해하며 버티라는 것인가? 아무리 이야기라지만 말도 안돼!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고서는 흥부놀부전을 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온 지 30년 가까이 되는 지금은 당연히 모든 게 그 시절보다 훨씬 개선되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 뉴스를 보다 보면 ‘모두 내꺼’식 놀부들이 떼로 등장한다.
그것도 한 나라의 지도자급이라는 이들이 완전 개념상실 놀부족 같다. 동산 부동산은 말할 것도 없고 규제가 느슨한 지적재산권 부분 역시 내놓고 염치가 없다. 학생들 시간은 당연히 내 시간, 그들의 논문은 내 논문, 돈만 주면 논문 대필이요, 돈과 권력만 있으면 어느 상황에서건 학위취득이 가능해 보인다. 관행이라는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돌아다닌다.
세월은 이런 사람들과 사건들과 좌충우돌 하며 흘러왔고 흘러 갈 터이다. 그 과정에서 당하는 이들에게 매순간은 얼마나 혹독한 순간들이었을까. 그래도 그 진행 방향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일 것이라는 희망이나마 안겨줄 수 있는 세월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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