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ay which we fear as our last is but the birthday of eternity.
우리가 마지막 날이라고 두려워하는 그날은 바로 영원이 탄생하는 날이다.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으로 유명한 세네카{Seneca]의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 시대를 살았던 고대 로마 제국의 사상가/정치가/문인이었지요. 정치인이 아니라 정치가(政治家)로 칭송받는 건, 참된 철학과 소신이 있는 리더였기 때문입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세상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애쓰는보디삿트바[Boddhisattva]였기에 위대한 철인정치가로 기억되는 분입니다. 기원전 4년에서 기원후 65년까지 근 70년 사시다가 소크라테스처럼 자살형에 처해져 꿋꿋하고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셨다 전해집니다.
육신의 죽음을 맞는 날은 곧 ‘영원’[eternity]의 생일임을 자명(自明)하게 아셨기에 조금도 굽힘없이 당당한 죽음을 맞으신 겁니다. "현자는 삶을 갖는 동안만 산다고 생각하지 않고, 삶이 필요한 동안만 산다고 생각한다." 그런 말씀도 하셨다네요. 참으로 당당한 어조입니다.
The day which we fear as our last is but the birthday of eternity.
우리가 마지막 날이라고 두려워하는 그날은 바로 영원이 탄생하는 날이다.
진리를 쉽게 말하는 사람을 현자[a sage]라 합니다. 세네카의 말씀도 쉽습니다. 어려운 단어가 없습니다. 마지막[last]이라고 두려워 하는[fear] 날[the day], 그게 곧[but] 영원[eternity]의 생일[birthday]이다.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신학/철학 논문으로 쓰자면 한도 끝도 없는 주제가 죽음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활자와 지면을 마주하고 곱씹어도 끝내 모를 주제가 죽음입니다. 체험이 불가능하니까요. 아니, 결국 누구나 체험하게 됩니다. 다만, 체험담을 나누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렵고 두려워 하는 겁니다, 죽음이란 걸.
사실 즉슨, 따로 실재(實在)하는 지도 의문입니다. 다만 사람들 머릿속에만 ‘없이 존재’하는 신기루가 혹여 ‘죽음’이란 물건[?]이 아닐런지요? 모를 일입니다. 오직 모를 뿐! Only Don’t Know!반야심경의 ‘불생불멸’(不生不滅)을 굳게 믿고, 바가바드 기타의 ‘불생불멸’(不生不滅)로 다지고 또 다져도, 체험지(體驗智)가 없는 알음알이는 그저 앎에 지나지 않습니다.
체험을 통해 확실히 굳어진 지혜가 아니곤 모두 사상누각입니다. 그러니 쉽게 허물어집니다. 세네카 어른처럼, 죽는 날이 바로 생일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어려운 겁니다.
티벳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는 날 난 기쁜데 사람들이 울고, 태어난 날 난 슬픈데 사람들이 웃네." 아메리칸 인디언들도 비슷하게 말하지요. "When you were born, you cried and the world rejoiced. Live your life so that when you die, the world cries and you rejoice." 그대가 태어날 때 그대는 울고 세상은 기뻐한다네. 그러니 세상을 살게나. 그리하여, 그대가 죽을 때 세상이 울더라도 그대는 기뻐할 수 있게 말일세.
The day which we fear as our last is but the birthday of eternity.
우리가 마지막 날이라고 두려워하는 그날은 바로 영원이 탄생하는 날이다.
지인이 70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습니다. 이제 몇시간 후, 고인이 된 그분을 뵈러 갑니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사건, 그 후의 여정을 어떻게 잘 도모하고 계시는지 뵈러 갑니다. 어찌 확인할 지는 모를 일입니다. 다만 뵙고 느낄 뿐이죠. 흔히 사후세계라 말하는 ‘Afterlife’ 여정에 따스한 격려의 손길을 올려 드리기 위해 가보는 겁니다.
얼마전 들은 어느 자매의 신앙 간증이 생각납니다. 3대째 목사님 집안의 모태신앙인 따님 얘기입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세속보다 더 세속적인 일들에 신물이 난 따님, 결국 크리스천이란 가식과 위선을모두 집어 던지게 됩니다. 거의 무신론자로 살던 그녀에게 어느날, 평생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사시던 할머니의 위독함이 전화 한통으로 전해지고, 부랴부랴 임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찬란한 은총의 순간이 도래합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 방금 돌아가신 할머니의 안색이 서서히 평정을 찾더니 어쩌면 그렇게도 젊고 다른 모습으로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바로 눈 앞에서 변해가더란 겁니다. 틀림없이 누군가를 만나 진짜 ‘기분(氣分)좋게’ 떠나는 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답니다. 그리고, 한편, 그렇게 기분좋게 떠나지 못할 자신의 처지가 홀연 상대적으로 무섭게 느껴지더란 겁니다. 결국 …… 회심(回心)하게 되죠.
"The day which we fear as our last is but the birthday of eternity." 마지막 날이라고 두려워하는 그날은 바로 영원의 생일이다. 세네카의 이 말씀과 어느 자매의 간증을 하얀 부의(賻儀) 봉투에 담습니다. 이제 마주할 관 속의 지인, 그분의 명복을 빌며 죽음의 날이 또 한번의 멋진 생일이길 기원합니다. 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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