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란 그 항구의 객선머리는 언제나 파시(派市)의 재자터 같이 시끌벅쩍 했다. “잘 가이소!” “잘 가소!” 라는 여인과 사내의 말에 이어 그들의 가슴에 품은 못다한 말 한마디를 채 끝내기도 전에 배는 산판 머리를 떠나 항구의 방파재를 돌아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꼭 돌아 오라는 그들의 소리가 떠나가는 그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떠나간 사람이 다시 돌아 온다면, 그들이 못다한 말을 토해낼 기회는 있지만, 만일에 돌아 오지 않는 날에는 그들이 못다한 말은 가슴에 엉어리가 되어 아프다! 어쩌면 나도 그들과 같은 엉어리를 가슴에 품고 긴 세월을 살아 왔는지 모른다.
이같은 항구의 생리처럼 숙명처럼 작품세계에서도 그 글속에 못다 담은 사연이 너무도 많다. 나의 전공인 연극작품을 무대에 올려 놓았을 때, 그 장면에 이런 대사를 집어 넣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같은 것 말이다. 그러한 아쉬움은 내가 어쩌다 쓰게된 4백편이 넘는 수필 집필 과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 까닭은 수필이란 2백자 원고지 13매 안쪽에 담아 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달에 발표한 ‘6월이면 생각 나는 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 났다. 그래서 나는 지금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 낙수(이삭)을 주워 담듯, 그 속에 못다 담은 사연들을 주워 담아 본다.
8월3일, 농부 옷차림으로 변장하여 정능에서 한강변까지, 젊은이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는 유령의 도시를 자전거로 달려 가면서 느낀 가죽포대가 내 몸을 조여오듯 한 압박감과 위기감 같은심리묘사를 그 글 속에 담지 못했었다. 그리고 간신히 용산 교통병원에 도착 했을 때 인민군 보초병이 “동무 무슨 일로 왔소?” 라며 나를 막아 섰다.
그 때 나는 서스름 없이 “김동선 내과 과장이 날 만나자고 해서 왔소!” 라고 거짓말을 들이댐으로서 그 보초병의 방위선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정능 인민위원회 정문에 도착하여 밀짚모자와 목에 감았던 수건을 풀어 자전거 핸들에 걸어 놓고는 위원회 사무실 현관에 들어가자 평복의 장총(長銃)을 든 보초가 나를 막아 섰다. 그 때 나는 김과장이 안겨 준 큰 봉투를 그의 얼굴에 바싹 갖다 대고는 마치 다른 인민위원회에서 서류 전달차 온 것처럼 “이 서류 위원장에게 전달하러 왔소!” 라고, 또 한번 대담한 거짓말을 들이대고는 교통병원에 이은 차 저지선을 무사히 넘어 위원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위원장실에 들어서자 인민군이 아닌, 그것도 내 체구와 닮은, 빼빼 마르고 얼굴색이 병색(病色)인 하얀 얼굴인 평복의 위원장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직감적으로 사상범으로 마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가 풀려 나온 사람이란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수월하게 남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증명서에 도장을 찍어준 것은 김과장이 발부한 진단서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와 내가 가냘픈 체구를 지녔다는 공통점에서 일종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리(心理)에 의한 것이었다.
이같이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의 배수진 수법이 아닌, 정면돌파의 전술이랄까, 연극에 있어서의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한 성공적인 연출로 해서 나의 서울 탈출작전은 그렇게 성공했던 셈이다.
한편 내 고향 통영과 내가 서울에서 걸어 내려와 머물렀던, 고성의 지리를 잘 아는 마산(馬山)출신의 소설가 이동휘씨가 6월달의 내 칼럼을 읽고서 나에게 던진 질문은 “왜 서울에서 힘겹게 고성까지 걸어 내려와서, 고성에서 지척인 통영에 들어가지 않았느냐?” 였다. 이에 대해 “귀신 잡는 해병대가 통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목인 ‘언문고개’를 철통 같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인민군이 쳐들어 가지 못했기 때문에서 였다!” 고 말하자 그제서야 수긍한 듯 고개를 끄득였다.
그런데 내가 지난 6월의 ‘6월이면 생각 나는 일’ 이란 글에 꼭 담았어야 했을 대목이 있었다면 그건 내가 고성의 허군 집에서 신세지고 있던 어느 날, 허군집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의무대 대장이 우연하게 허군집에 들렸다가 내가 의과대학생이란 사실을 알고 자기들 의무대에 와서 도와 주면 숙식제공은 물론, 월급까지 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거기서 나는 이번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항에서 허군집에서 오래 신세질 수 없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반승락을 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내가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자, 내 등 뒤에서 “얘야, 그길로 가면 안 된다!” 라고 외치는 어머니의 다급한 소리에 잠을 깼다. 그래서 나는 그 의무대에 가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꾼지 사흘 후,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의 소식이 전해지자, 내가 가기로 반승락 한 의무대를 포함한 인민군들이 북으로 도주해 갔다. 여기서 만일 내가 단 며칠 동안이라도 그 의무대에 몸 담았었더라면 내 사촌 자형(姉兄) 노서방이 그랬듯이, 나도 그들 인민군의 부역자(賦役者)로서 그들과 함께 산을 타고 도주하다가,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서 백골(白骨)이 되었을게 뻔했던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도 머릿카락이 하늘로 쭈빗 치솟는 아찔함을 느낀다.
하나님은 간절히 구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말과 같이, 후일에 ‘기도의 할머니’로 이름 났던,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나를 살렸다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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