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o abides in non-action, Yet nothing is left undone.
도(道)는 항상 함이 없지만,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함이 없다.
道常無爲 而無不爲(도상무위 이무불위)
노자 도덕경을 한문/영문/우리말로 모두 읽어 YouTube에 올린 게 벌써 2년 전입니다. 한 달 정도 도덕경 낚시질에 도끼자루 썪는 줄 모르고 지낸 시간들 --- 벌써 까마득합니다. 도덕경 81장을 모두 읽어 올렸건만, 기억이 생생한 구절들은 겨우 한웅큼이나 될까? 그 중, 늘 뇌리에 맴도는 구절은 바로 37장입니다.
도(道)는 ‘하지 않음’[무위, 無爲]에 늘 거한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채 남겨진 건 아무 것도 없다. 하지 않는 데, 모든 걸 이룬다? 얼뜻, 역설 같습니다. 파라독스[paradox]로 들립니다. 범부가 알아 듣기엔 뭔가 고매한 뜻이 담긴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채로 남겨진 것은 없느니라!" "Yet nothing is left undone." 이 말씀엔 긴장감마저 느껴집니다.
흔히, 노자 도덕경은 이 풍진 세상을 도피하는 형이상학적 가르침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으로 회귀하라. 억지로 이루려 하지 말고, 세상 돌아가는대로 맡기라는 소극적 가르침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게 바로 도덕경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입견으로 도덕경을 읽다 보면 어느새, 세상을 이렇게/저렇게 경영하라는 가르침들을 여러번 만나게 됩니다. 아니, 세상을 떠나 무위자연하라면서, 세상을 다스리고 경영하는 지혜의 가르침은 왜 덩달아 줄줄이 나오는 걸까? 알고보니, 공자/맹자의 가르침과 더불어, 그 분들보다 조금 앞선 노자의 가르침 또한 본래 천자(天子) 임금님과 같은 통치자들을 위한 제왕학(帝王學)이었다는군요.
Tao abides in non-action, Yet nothing is left undone.
도(道)는 항상 함이 없지만,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함이 없다.
道常無爲 而無不爲(도상무위 이무불위)
뜰 앞의 잣나무를 보십시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잘 자라며 스스로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애써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동시에 ‘하지 않음’또한 없는 ‘무불위(無不爲)’입니다. 그래서, “뜰 앞의 잣나무”입니다. 그저, 무위자연(無爲自然)일 뿐입니다.
그럼, 왕과 제후들, 요즘 세상으로 말하자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에서 세상을 이끄는 소위 ‘리더’들을 위한 ‘무위자연(無爲自然)’ 경영법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저 가만히 있으란 얘기는 아닐테고.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세상을 이끌라는 말씀인가? 최고의 정치는 무위의 정치이며, 백성들은 왕이 누군지도 뭘 하는지도 모르고 살며, 그저 세상만사 형통한 건 그저 자기네들이 잘 하기 때문이라 여기는 그런 세상을 이끌자면 과연 어떤 실천 덕목이 필요하다는 말씀인가?자, 이쯤되면 구체적인 답이 나와야 할 때입니다. 한마디로, 노자 도덕경이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욕심을 이기는 양심’에 따르는 경영법을 말합니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다스리고 나아가 타인과 세상을 이끌 때에도 오로지 양심의 소리에 따르며 욕심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삶, 그 근본은 바로 ‘양심’입니다. 양심 안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들어있어, 사랑하고 공손하며 정의롭고 지혜로운 본성이 늘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다만 욕심이 본성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지요. 베풀라는 양심의 명령은 인색한 에고의 욕심을 이겨내기 힘듭니다. 그럴 때,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작은 나’의 욕심을 이기면서 본래 자연스러운 인(仁)을 ‘억누르지’ 말라 명합니다. 있는 그대로 내어 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무위’요 그래서 ‘자연’입니다.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건 내 안의 양심을 ‘누르는’ 겁니다. ‘억지로 누르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무위자연입니다. 정의로움이 곧 무위자연입니다.
측은한 걸 보면 돕고 베풀 마음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무위자연입니다. 부당한 걸 보면 수치심과 울분/공분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무위자연입니다. 인(仁)과 의(義)는 그대로 무위자연입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다스릴 때나 남을 이끌 때, 무위자연은 곧 본성에 따르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면, 진짜 간단해집니다. 대한민국 홍익학당의 가르침 "양심경영의 지혜," 이 또한 하늘이 명한 본성대로 따르라는 가르침입니다. 결국 이겁니다. "내가 당해서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론, "내가 받아서 좋은 걸 남에게 해주라." 이 황금률[the Golden Rule]이 바로 노자 도덕경의 제왕학(帝王學) 지혜와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Tao abides in non-action, Yet nothing is left undone.
도(道)는 ‘하지 않음’[무위, 無爲]에 늘 거한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채 남겨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왜 그럴까요? 이젠 아시겠죠? 오로지 천명(天命)의 본성인 양심만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욕심대로 살면 유위(有爲)입니다. 억지로 지어 하는 겁니다. 그러나, 본래마음인 양심대로 살면 다만 무위자연(無爲自然)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게 이루어집니다. 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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