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그림 활쏘기김정수필자는 지난번 칼럼 <역린>을 준비하면서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에 대해서 흥미있는 사실 몇가지를 보았다.
첫째 정조는 그 자신 대단한 독서가였고 또한 저술가였다는 것이다. 특히 주자(朱子)의 모든 글을 통독하였고 그 중 편지 100편을 모아 ‘주서백선(朱書百選)’을 편찬하였으며, 홍재전서(弘齊全書)라는 대작을 손수 저술하였다. 그리고 온 독서를 장려한 군주이기도 하다. “뜻은 배움으로 인하여 확립되고, 이치는 배움으로 말미암아 밝아진다. …세상의 아름답고 귀한 것 중에 책을 읽고 이치를 궁리하는 것만 한 것이 어디 있으랴!” 정조의 어록인 일득록(日得錄)에 나오는 글이다.
또 하나는 정조 자신 대단한 무술인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처럼 조선 제일의 殺手 칼잡이와 1대1로 겨눌 수 있을 정도로 검술이 대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활 솜씨는 단연코 신궁(神弓)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은 사실이였다. 왕조실록 정조편에 정조의 활쏘기 연습이 여러번 나온다. 정조는 한 번 연습에 나가면 보통10순을 연달아 쏘았다는데, 1순이 화살 5대이니까 10순이면 50대를 날린다는 계산이 된다. 어떤 날은 20순도 쏘았다.
<어사고충첩>은 정조가 왕위에 오른 다음부터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정조는 표적에 50발 중 49를 명중시키고 나머지 1발을 일부러 딴 곳으로 쏘았다. 어느날 곁에 있던 신하가 한 발이 빗나간 것을 아쉬워하자 정조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활솜씨를 과신하여 50발을 모두 맞춘다면 그것은 겸손의 미덕을 모르는 것이다. 겸손은 더 함을 받고(兼受益), 교만은 덜어냄을 부른다(滿招損)고 하지 않는가?”
정조는 너무 책을 읽어서 때문인지 노안이 빨리 왔다. 40대 나이에 이미 시력이 아주 나빠진 것이다. 영화나 사극에서 안경을 쓴 임금 정조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것은 매우 사실에 충실한 장면이다. 시국 문제로 좌의정 이병모와 차대(次對)하는 자리에서 정조는 자기 고민을 털어 놓았다. “…몇 년 전부터 점점 눈이 어두어지더니 올봄 이후로는 더욱 심하여 글자의 모양을 분명히 볼 수 없다.” 그러나 정조 임금은 그렇게 시력이 나빠졌어도 정해진 시간에는 꼭 창경궁의 활터인 춘당대에 가서 150步(145미터) 거리의 먼 과녁에 화살을 날려 명중시켰다. 과녁은 반드시 눈으로 만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도 읽는다. 이것를 심안(心眼) 이라고 하던가?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항상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세력인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훗날 이렇게 회고하였다. “옷을 벗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던 날이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니, 저궁의 고립과 위태함이 어떠했던고.” 왕위에 올라서도 반대 세력인 집권 노론세력과 끊임없이 정치 투쟁을 치러야만 했다. 이 거대한 세력과 싸워서 이기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래서 정조가 활쏘기에서 표적으로 삼은 것은 150보 거리에 있는 눈에 보이는 과녁이 아니라 바로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은 과녁이었다.
살벌한 당쟁에서 느껴야 했던 두렵고 떨리는 마음, 아버지를 죽인 세력에 대한 노여움, 그러나 참고 기다려야 하는 암울한 현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자칫 잃기 쉬운 평정심, 정조는 이런것들을 향해 활 시위를 당긴 것이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구절 “활쏘기는 각각 자신의 과녁을 향해 쏘는 것이다”를 실천한 것이다.
정조 임금의 활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 대한궁도협회가 정한 승단 기준을 찾아 보았다. 승단은 9순(45발)을 쏘아서 맞추는 숫자를 기준으로 결정하는데 과녁에25개 이상이 맞으면 초단이다. 2단은 28개 이상, 3단은 29개 이상, 4단은 30개 이상, 이렇게 해서31대 이상을 맞추면 5단이 되어 명궁(名弓)이라는 호칭이 부여된다. 난중일기에 보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기록이50발중 42발 명중인데 이정도이면 지금 기준으로 궁도10단이다. 그런데 정조는 50발 중에서49를 명중 시키고 하나는 일부러 딴 곳으로 날렸다. 그래서 최고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절제하고 자만에 빠지려는 마음을 스스로 경계한 것이다.
활을 당기는 팔은 동(動), 땅을 버티고 선 두 다리는 정(靜). 날아가는 화살은 동이고 멀리 서있는 과녁은 정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오로지 하나가 된 경지, 그렇기 때문에 활쏘기는 정중동(靜中動)이면서 또한 동중정(動中靜)이다. 그렇게 정조는 활 쏘기로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정조는 실학을 크게 육성시키고 서자(庶子)라도 인재라면 파격적으로 높이 쓴 성군(聖君)으로 역사에 손 꼽힌다. 세종대왕이 찬란한 조선 문명의 기틀을 세웠다면 정조는 18세기 후반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군주였다.
1800년(정조 24년) 양주와 장단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라고 했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상(大喪)이 났다고 조선왕조실록이 기록하고 있다. 한달 가까이 악성 종기로 고생하던 임금 정조가 48세로 승하한 것이다.
정조는 참으로 훌륭한 국왕이였는데 아쉽게도 命이 짧았다. 이것도 국운(國運)이라면 국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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