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산 지가 벌써 30년. 떠나 온 곳의 정치나 사회 문제보다는 이곳 내가 사는 곳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갖자 생각은 하지만, 솔직히 바다 건너 들려오는 한국 소식에는 이러한 다짐 없이도 저절로 관심이 간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치러진 이번 선거에 대해서는 이미 다양한 소감과 분석들이 나온 터라 새삼 덧붙이고 싶은 것은 없지만, 막판에 터져 나온 고승덕 교육감 후보 부녀간의 공방을 보노라니 비슷한 또래의 딸을 키우는 사람으로 한마디 보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사실 그는 내가 이번 선거에서 “당선되지 말았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랐던 몇몇 후보 중의 하나였다. 다른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본인이 자랑스럽게 털어놓은 비빔밥 에피소드(그는 하루에 17시간 씩 공부에 매달렸으며, 밥 먹는 시간조차 아끼기 위해 어머니께 모든 음식을 잘게 썰어 달라 부탁하여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에 이르러서는 정말 난감했다. 다른 직책도 아니고, 교육감을 하겠다는 사람이, 그것도 한국처럼 아이들이 살인적인 입시 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에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죽지 않더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것을 보고는 입이 안 다물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딸이 올린 글로 인해 그가 “딸을 버린 아버지”로 맹렬한 비난을 받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수재라도 한국의 여느 다른 아버지들처럼 아버지 노릇에 대해 잘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들은 한 세대 만에 너무도 달라진 세상에서 적잖이 당황하며 허둥거리고 있다(지구상에서 그 어떤 나라가 반세기만에 농경사회에서 IT강국으로 도약을 이루어내겠는가).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혼란스런 문제 중의 하나가 부모의 역할인데, 이는 아들딸로부터 요구받는 부모의 모습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부모님 상과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내 경우만 해도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자라온 것 같은데도 “아버지”를 “아빠”라 부른 기억이 없다. 물론 “아빠”와 장난을 치며 깔깔거렸던 기억이나, 사춘기 시절 “아빠”에게 고민을 털어 놓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도 없다.
그 시절만 해도 처자식을 부양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가장에게는 그에 걸맞은 권위와 대접이 주어졌다. “좋은 아버지란 가족들을 굶기지 않는 것이 첫째”라고 믿었던 어려운 시절의 아버지들에게는 아마도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거나 “부모와의 정서적 교감이 자녀의 성장에 중요하다”는 개념조차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라난 아들은 그 후에 어떤 아버지가 되었을까. 지나친 일반화일지 모르지만, 아마도 자라면서 뇌리에 각인된 자신의 아버지 모습에서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상전벽해처럼 달라진 세상은 아버지들에게 가족 부양의 의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이들에게는 학습의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달라진 세상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는 첫 걸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들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 나서는 것일 것이다. 더 이상, 이전 세대의 권위와 대접만을 기대하지 말고, 변화된 책임과 역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감이란 듣는 내 입장이 아니라, 말하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딸이 “아버지는 교육감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이러이러한 것도 감수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니?”라고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동안 참 많이 아팠었구나”라고 말해주는 것이 공감이다.
대화와 설득도 공감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아버지의 날에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공감 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달라진 세상에서 새로운 관계 맺기에 나서는 모든 아버지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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