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 long as there is suffering in the world, there is spiritual work to do.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해야 할 영(靈)적 일이 있다.
Before enlightenment, chopping wood and carrying water. 깨닫기 전, 나무하고 물 긷는다.
After enlightenment, chopping wood and carrying water.
깨달은 후, 나무하고 물 긷는다.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 얼핏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속이 다릅니다. 전혀 딴판입니다. 크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산이 산이고 물인 것은, 일단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실상을 깨달은 다음에서야 비로소 가능하다지요. 괜한 말 장난이 아닙니다. ‘변형’[Metamorphosis]이 없다면 불가능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 , 깨달음이니 니르바나니 하는 ‘거창한’ 사건은, 확장이 없다면 별무소득일 수도 있습니다. 산중에 홀로 앉아 황홀한 깨달음에 취해 산다면, 세간의 고통은 어쩌란 말입니까? 물론 사람들이 간혹 찾아와 깨달은 이의 에너지에 심취해 황홀한 실존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면 그 또한 전혀 무소득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깨달음의 참 목적은 그저 깨닫기 위함이 아닙니다. 깨달음 후의 나무하고 물 긷기는 깨달음 전과 영 딴판이기 때문입니다.
As long as there is suffering in the world, there is spiritual work to do.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해야 할 영(靈)적 일이 있는 법이다.
이렇게 말하는 ‘수리야 다스’[Surya Das]는 1950년 생 미국인 제프리 밀러의 법명입니다. 뉴욕 대학 졸업 후, 네팔/인도/티벳/일본 등을 떠돌다 결국 티벳 불교의 라마승 인가를 받은 미국 본토 2세 불자(佛子)입니다. 얼마 전 이곳 실리콘밸리의 구글 본사에서 조촐한 강연을 베풀기도 했던 라마 수리야 다스, 그 분의 2007년 저술 "Buddha Is as Buddha Does"를 다시 읽습니다. 부처란 부처하기 나름이다. 부처란 부처의 행동을 이름이다. 즉, 부처란 그저 이름이 부처가 아니고 부처의 행동을 말하는 거라는 제목입니다.
"We are the Boddhisattvas, the future Buddhas of this world." 우린 보살들이다. 이 세상 미래의 부처들이다. 이렇게 서슴없이 외치는 수리야 다스의 자상한 법문이 288쪽 갈피들 속에 잔잔하게 펼쳐집니다. 핵심은 “실천”입니다. 깨달음 뒤의 “보살도”가 진정한 붓다의 길이라 합니다. 깨달았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경영’하는 "보살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깨달음마저도 헛것이랍니다. 깨달음 후의 ‘바라밀 행’이 없다면 니르바나도 또 하나의 우상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홍익학당" 윤홍식 대표의 강의를 듣고 또 듣습니다. 대승기신론 강의를 듣습니다. 화엄경 강의를 듣습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하며 무릎을 칩니다. 불교방송을 통해 5시간 남짓 계속되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수심결 풀이를 들으며, 왜 깨달은 후에도 계속 닦아야 하는가를 재차 확인하게 됩니다. 돈오점수(頓悟漸修)! 힘들게 찾아 집으로 데려온 소를 계속 길들이며 평생 ‘목우자(牧牛子)’의 길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자명해집니다. 수리야 다스의 ‘바라밀 행’ 말씀도 덩달아 짙게 공명합니다.
It is not enough just to meditate and pray. We must take positive action in this world.
명상과 기도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2006년, 수리야 다스를 "the American Lama" 즉 미국판 라마승이라 소개하는 달라이 라마의 말씀입니다. 홀로 앉아 명상과 기도만 할 때가 아니란 겁니다.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6바라밀"이 저절로 나오는 실천을 위한 게 명상이요 기도란 겁니다. 다만 수단이요 방편일 뿐입니다. 깨달음의 참 목적은 베풀고/지키고/참고/부지런하고/고요하고/지혜로운 행동으로 세상을 이끌고 경영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나홀로 황홀한 경지에 머물며 세상을 등지고 사는 건 결코 깨달은 이의 처신이 아니라 합니다. ‘바라밀’은 범어 ‘paramita[파라미타]’의 음역으로, ‘도피안(到波岸)’ 즉 저쪽 피안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행을 말합니다. 깨닫기 전엔 수행으로 하지만, 깨달음 후엔 ‘저절로’ 되는 게 ‘바라밀’입니다. "도와 주어야지"하는 생각도 없이 ‘저절로’ 돕는 게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는 돕는다는 유위(有爲)의 행동인데 비해, 보시’바라밀’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조차 모르게 저절로 우러나는 무위행(無爲行)을 말합니다. 아니하곤 못배기는 게 바라밀입니다.
화씨 100도를 웃도는 뜨거운 주말 오후, 밝게 웃는 수리야 다스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동네 수영장 파라솔 밑에 앉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물 속에서 시끄럽습니다. 잠시 후 ...... 아이들 소음이 안들리는 어느 찰나, 수리야 다스의 따끔한 일갈이 뜨거운 햇살로 뇌리를 관통합니다. "부처란 부처 하기 달린 거라구!" Buddha Is as Buddha Does! 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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