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시인 T.S 엘리엇이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표현한 그 말을 우리가 너무도 흔하게 인용하고 있기에, 그 말이 마치 유통기간이 지난 식품처럼 진부하게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지난 4월초의 많은 탑승객을 실은 마레이지어 항공기의 바다 속 추락사고와 그 달말에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는 엘리엇의 설파(說破)가 새삼 고개를 쳐든 비극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진정한 잔인한 달은 4월이 아닌, 이 6월인성 싶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 이 6월은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하마터면 죽음의 길로 발 헛디뎌, 그 해 21세 나이에 저세상 사람이 될 뻔 했던 달이기도 하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낮, 나는 국립극장 객석에 앉아 국립극단 제2회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때 의정부 쪽에서 들려온 대포소리! 그리하여 6.25가 일어났다. 서울은 순식간에 인민군 치하에 들어갔고 이어 남쪽으로의 피난민의 행열이 쓰나미의 파도처럼 쏟아져 내려 갔다. 한편 서울에서는 인민군과 치안대의 올가미가 내 또래의 젊은이를 덮쳐 이용군으로 사지(死地)로 끌고갔다. 그래서 나는 한강로 1가의 하숙집에서 두다리 뻗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정능에 있는 먼 친척의 유리공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는 공장 창고에서 숨어 지내기를 한달!.... 그러나 이용군 차출의 갈구리 같은 붉은 독거미의 가시발이 나를 향해 성큼 성큼 기어 오는듯한 압박감을 느껴, 서울을 벗어 나는 서울 탈출작전을 시도 했다.
8월3일, 허름한 흰 한복에다 목에는 흰 세수수건을 불끈 묶고, 밀짚모자까지 눌러 쓴, 연극에서의 농부 같이 변장한 나는 유리공장에 세워 놓은 고물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한강변 내 하숙집 가까이에 있는 교통병원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그 까닭은 내가 대학 1학년 때, 내 폐렴증세를 치료해 준게 계기가 되어 내가 하교 길에 자주 들림으로서 나를 친조카처럼 여겨온 김동선 내과 과장을 만나기 위해서 였다.
2시간의 필사적인 질주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인지 김과장이 인민군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소집되어 병원에 나와 있었다. 내가 도어를 살며시 열고 그의 방에 들어 서자, 김과장이 “주군, 옷차림이 왜 그래?” 라며 놀라와 했다. 거기서 내가 김과장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내가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알았어!” 라면서 폐결핵 말기 환자의 엑스레이 사진과 그의 소견서가 곁드러진 진단서를 작성하여 도장을 꾹 누른 후, 나에게 안겨 주면서 “성공을 빌겠네!” 라며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나는 김과장이 준 봉투를 자전거에 담아 실고 정능 인민위원회로 달려갔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듯이 말이다. 내가 인민위원장에게 내민 인민군이 서울에 오기 전에는 내가 폐결핵 말기 환자로 그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과 앞으로 요양이 필요하다는 김과장의 가짜 진단서가 그에게 통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해방(점령)된 진주지역으로 병 치료차 내려간다는 증명서를 발부해 주었다.
그 다음날인 8월4일 나는 남쪽으로 향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으로 내려가는 길목 마다에 인민군의 초소(검문소)가 지뢰밭 같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지뢰밭을 무사하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위원장이 끊어 준 증명서가 큰 몫을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한편 내가 가방 속에 챙겨넣고 간, 중학시절의 연극사진 또한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 나를 검문하려던 한 군관(장교)이 검문할 생각은 않고 연극사진을 한참이나 구경하고 난 뒤, “동무,나도 중학시절에 동무처럼 연극무대에 섯수다!” 라고 뇌인 그의 말 속에는 그의 지난 날의 향수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는 그 군관은 나에게 식사대접은 물론 어느쪽 길로 가면 안전하다는 길 안내까지 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상처 입은 어린 사슴처럼 절뚝거리며 걸어가다가, 어느 산기슭에서 물집이 터져 아픈 발을 움켜쥐고, 또 시냇물에 아픈 발을 담구고는 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해질 무렵 한 집에 들러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자, 혹시나 국군패잔병일지도 모르는 나를 재워 주었다가 인민군에게 들켜 낭패를 당할까바 재워 주기를 거절당했던 그날 밤, 외딴 빈집 처마끝 기둥에 기대어 자던 뻐꾸기도 울음을 멈춘 그 밤이 어찌 그렇게도 적적하고 길었든지..... 그러나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듯이, 나는 서울에서 떠난 지 20여일 만에 통영과 가까운 고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통영에 들어갈 길이 트일 때까지 나는 스무며칠을 넘게 중학 한해 후배였던 허찬종군 집에서 지냈다.
9월15일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이은, 28일의 서울탈환으로 인민군이 북으로 도주해 버림으로써 드디어 통영으로의 길이 틔여 졌다. 나는 통영으로 향해 달려가기 전에 김과장이 만들어 준 가짜서류와 엑스레이 사진, 그리고 인민위원회 발행의 증명서를 모두 불태웠다. 그 까닭은 내가 인민군의 동조자로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였다. 나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 보면서 소설의 픽션 스토리가 아닌 나의 서울 탈출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에다 어릴적부터 남달리 당돌한 나의 성격,그리고 내 몸 속에 조조(曺操)의 꾀 같은 기지(奇智)의 인자가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영원히 이루어 질수 없을뻔 했던 나의 가족과의 만남은 이루어졌지만, 남과 북의 잔인한 6월은 언제 끝날 것인가? Jevi4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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