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촌들이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때가 있었다. 명절 때나 집안에 무슨 잔치가 있던 날은 사촌이며 육촌들까지 모두 모여서 집안이 온종일 시끌벅적 했다. 옛날 옛적 육십년도 더 넘었던 시절에 친척들은 오기만 하면 며칠씩 묵고 가던 때였다. 집안은 온종일 온갖 음식 냄새며 또 찰떡을 치는 소리, 어느때는 일하는 아줌마들이 밤새워 엿을 고아 만들던 때도 있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집안을 헤집고 다니며 장난도 치고 서로 싸우기도 했다. 나는 막내였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우리 친언니들보다 나이가 비슷한 사촌들과 더 잘 어울렸다. 나와 제일 친했던 동갑내기 현숙이는 십대에 죽었기 때문에 그일은 내 마음에 지금도 큰 상처로 남아있다.
나보다 몇달이 어렸고 순한 편이었던 그애는 늘 영악한 편이었던 내게 놀림의 대상이었고, 먹을 것도 내게 빼앗기곤 해서 나는 또 징징대는 그애를 울보라고 놀렸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우리들은 한방에서 먹고 자며 항상 붙어 다녔기 때문에 그 시절은 내게 언제나 그리운 시절로 남아있다. 철이 들어 내가 그애를 정말 사랑했을 때 갑자기 그애가 떠나가서 나는 오랫동안 그애가 보고싶어 많은 날을 눈물짓곤 했다.
그애가 죽어 한줌의 재로 돌아왔을때 나는 과수원으로 올라가는 한적한 길가에 그애를 묻어주고 철마다 예쁜 들꽃들을 따다가 그애의 작은 무덤 앞에 놓아주곤 했다. 내가 문학 소녀로 시를 쓰고, 지금 한줄의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겨진 것도 어쩌면 과수원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살았고, 일찌기 십대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내 유일한 친구며 사촌이던 그애를 잃어버려서가 아닐까 나는 가끔 생각하곤 한다.
그애는 지금도 내 기억에 눈이 예쁘고 가냘픈 어린 소녀로만 기억돼 있다. 그후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갔나. 아픔도, 기쁨도 슬픈 날들이 다 지나고 이젠 편안한 한 항구에서 마치 닻을 내리고 쉬는 어떤 늙은 어부처럼 나는 마지막 한 지점에서 편안하게 늙어가고 있다. 이런 것을 인생이라고 사람들은 말하던가.
몇달 전, 우연히 친구들과 어느 한국식당에 들렸다가 나는 아주 낯이 익은 어느 중년의 여자를 보았다. 갑자기 나는 아! 하면서 그 여자의 얼굴에서 우리 어머니와 삼촌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쫓아가서 "너 영인이니?"하고 묻자 그 여자도 "언니!"하며 반색을 하는 것이었다. 외삼촌의 막내딸인 그애를 나는 아마 십여년 만에 만난 것 같다. 서로 동행이 있어서 많은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서로 전화 번호만 나누어 갖고 우린 또 헤어졌다. 그날 저녁 그 사촌 동생에게서 전화가 와서 우리는 못다한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나는 몇명의 사촌 동생들이 미국땅 곳곳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웃사촌만 못한 것이 바로 미국에 사는 사촌들이다. 서로 사는게 다 바쁘기도 하지만 미국이란 땅이 넓어서 정말 만날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영인이는 외삼촌의 막내딸인데 그 집엔 아들 한명을 얻고자 딸을 다섯명이나 낳았다. 내 기억에 외삼촌네 집에 가면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늘 복작댔다. 외삼촌은 어느 관청에 다니셨는데 작은 사택에서 어렵게 지나면서도 그 집은 늘 행복이 넘쳤다. 마음씨가 착한 외삼촌댁은 내가 가는 날이면 셈베나 캬라멜 같은 과자들을 사다가 놓고 주시곤 했다.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때 쯤 그 집에 약 두서너달 있었는데, 지금도 인상에 남는 것은 외삼촌이 일하러 나가실 때나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셨을 때 아이들 여섯이 모두 현관에 쪼르르 나가서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니면 "안녕히 다녀 오셨어요" 하고 모두 허리 굽혀 인사를 하는 모습이었다. 가난하지만 집안에 질서가 있고 사랑이 있었던 그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게는 또 다른 외삼촌이 한분 계셨는데 좀 괴짜인 그 삼촌은 두분의 외숙모를 거느리고 사셨는데 첫부인에게서는 두 딸을, 다른 부인에게서는 딸 하나를 두었다. 그들이 지금 모두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산다는 것만 알 뿐 우리는 미국에서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책을 몇권 내고 어느 여성 잡지에 인터뷰 한 것을 그들이 우연히 보고 잡지사를 통해 내 전화 번호를 알아내서 통화를 한 것이 전부다.
일찌기 소박을 당한 큰 외숙모와 함께 육이오때 완도까지 피난을 가서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와 함께 몇달을 살았지만 둘째 외삼촌은 한번도 그곳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대식구의 밥 당번을 맡느라고 늘 부엌 아궁이 앞에서 먼산만 바라보던 눈이 부리부리 하던 그 숙모의 모습이 어린 내게도 쓸쓸하게 비치곤 했다. 결국 그들 부부는 헤어졌고, 어찌어찌해서 늙그막에 모두 자식들 때문에 미국에 왔는데, 공교롭게도 외삼촌이나 외숙모네 식구들이 다 워싱턴 근처에 모여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와 나는 다시 한번 얄궂은 그들의 운명에 혀를 찼다.
이젠 큰 삼촌이나 작은 삼촌이나 또 외숙모들이나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어서 늘 친척들 간에 입방아에 오르던 그들의 이야기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아마 그 자식들도 이젠 칠십에 가까워지고 있을께다. 다만 어릴적 불행히 자라던 그 사촌들의 생애가 이제는 좀 편안하고 행복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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