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무명 겹저고리 안감은 갈매 옥색 명주였다. 웬일로 이아침, 그 순백 무명 저고리가 시상처럼 떠오르는 것일까? 어머니를 연상하게 하는 그 결 고운 무명 저고리를.
겹옷에는 겉감과 안감이 있고 옷감에는 반드시 겉쪽과 안쪽이 있다. 때로 안과 겉이 똑 같아 보이는 천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분명히 겉과 안을 가려낼 수가 있다. 안과 겉은 동체이면서도 서로 다르고 연합하여 있으면서도 정반대에 있다. 그러나 어떻든 교감과 소통을 하는 관계다.
대개의 경우 옷의 겉감이 고급이면 안감도 고급이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겉감보다 안감을 훨씬 고급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흰 무명베 겹저고리 안감을 명주로 하는 경우이다. 가내공업으로 집에서 손수 짜낸 무명베의 질은 ‘세’로 따진다. 숫자가 위로 올라갈수록 고급이다. 일곱 세보다 열 세는 훨씬 고급이다. 열 세는 고급 면으로 가늘게 실을 뽑아 만든 얇고도 고운 천이다.
열 세 무명 겉감에 명주(비단) 안감이라니, 짐작만으로도 고급스럽고 색다르다. 무명베는 서민적이고 활동적이며 대중적인데 비하여 비단은 우아하고 고급스럽다.
무명과 비단, 두 이질감이 만난 영역에 피어나는 연합의 미, 이 양면성 속에 이루어지는 조화. 값진 비단이 투박한 무명베에 쌓여 있을 때 마치 고귀한 인격이 겸손하게 숨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선대 여인들이 얼마나 고급스러운 멋을 부리고 살았는지, 내면의 아름다움을 존중하고 살았는지, 그 척도가 되는 것 같아서 그 무명 겹저고리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때로 사람들은 겉과 안이 너무 달라서 우리를 슬프게 할 때가 있다. 안과 겉이 잘 어우러진 인격을 가졌다면, 내면이 겉보다 더 아름답다면, 환상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달 한국 방문 중 40~50분을 택시로 달려야 할 기회가 있었다. 기사님 코끝이 유난히 뭉툭하여 코주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큰 체구에 착한 고릴라를 연상시키는, 정감이 느껴지는 아저씨였다.
“아저씨 몇 년쯤 이 일을 하셨어요?” “한 50년 됩니다”로 시작하여 질펀하게 자기 이야기를 펴기 시작했다. 6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가난한 집 장남으로 도저히 학교를 졸업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미술 경연대회에서 항상 대상을 타는 바람에 미술 장학생으로 고등학교를 마쳤단다. 그림이 그리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때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네 명의 동생들에게는 자신의 소원인 대학 교육을 받게 해주어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한다.
그 시절 가장 짧은 기간에 터득할 수 있는 기술이 운전기술이었기에 택시운전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때라 새벽 4시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불면 총알같이 뛰쳐나가 밤 12시 사이렌이 불 때까지 일하면서 결혼도 포기하고 오직 동생들 뒷바라지 한다는 일념으로 사는데 옆 사람들의 간청으로 선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15세 연하의 여자에게 “동생들을 돌봐야 하니 좋은 가장은 될 수 없을 것”이라며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하자 했지만 불평 없이 따르겠다는 처녀의 말에 결혼을 했다고. 아들딸을 낳아서 동생들과 자녀들을 모두 교육시켜 결혼을 시킨 후 이제는 오후 5시까지만 일을 하고 일찍 귀가하여 저녁을 즐긴다는 것이다.
동생들을 위하여 희생한 삶에 후회는 없느냐는 질문에 전혀 없고 셋째가 속을 좀 썩일 때가 있지만 살기가 어려워서 그러려니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건장한 그의 외모는 70에 가까운 나이도 잊어버린 듯, 내가 바라본 옆얼굴에서는 청년의 피부 같은 생생함이 넘쳤다.
그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 그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는 문명의 편리함 보다 묵은 것의 고즈넉함을 느끼게 했다. 투박한 무명베 옷의 비단안감 같은 삶이었다고, 그분의 보람찬 자기실현의 생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통 위에 피어난 하얀 꽃, 순백의 목화송이 같은 그의 이야기가 이번 한국 방문에서 얻은 소산이다. 오늘의 한국인들 모두가 그와 같은 보람을 찾아서, 희생으로 상대를 배려하면서 비단안감 같은 삶을 살기위하여 즐거운 긴장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좋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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