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윤성 논설위원
▶ yoonscho@koreatimes.com
‘하프타임’에 써온 졸문들 가운데 가장 많은 피드백과 함께 시끄러운 논쟁을 일으켰던 것은 메이저리거 추신수에 관한 글이었다. 2009년 시즌을 잘 마무리해 성공시대의 초입에 들어섰던 추신수 앞에는 커다란 고민이 놓여 있었다. 병역문제였다. 2010년 아시안게임이라는 면제를 위한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결과가 어찌될지는 알 수 없는 일. 구단이 추신수에게 시민권을 제안했다는 뉴스도 흘러나오던 시점이었다.
칼럼의 요지는 추신수가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 예단할 수 없지만 불법이나 편법이 아닌, 법이 허용하는 자격과 권리에 의해 신분문제를 해결한다면(시민권 취득을 포함해) 그것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금은 설익고 성급했던 논쟁은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추신수는 다음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받아 자신의 ‘애국심’을 시험당할 뻔한 위기를 피해갈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의 포털사이트에 뜬 댓글들을 보면 병역의무의 신성함을 내세우는 의견들이 다소 있었지만 추신수가 어떤 선택을 하던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견해가 다수였다. 한국인들의 의식 변화를 읽을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한국에서 러시아로 귀화한 빅토르 안이 이번 소치올림픽에서 러시아를 1위로 이끌었다. 러시아가 받은 금메달 13개중 3개를 빅토르 안이 따냈으니 이런 평가가 결코 지나치지 않다. 한국이 내쳤던 빅토르의 부활은 한국 국민들에게 뼈아픈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빅토르의 처지를 이해하며 그의 금메달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힌 사람이 70%에 달했다.
집단의 목표보다 개인의 행복과 성취가 먼저라고 여기는 의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국적변경을 국가주의나 애국심의 관점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권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21세기의 트렌드와 궤를 같이 한다.
미래학자들은 21세기가 유목형 인간을 뜻하는 ‘호모 노마드’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해 왔다. 인류는 최첨단 기기를 갖추고 세계를 떠도는 ‘디지털 유목민’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 석학도 있고 일자리를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도는 ‘잡 노마드’의 시대를 예견한 학자도 있다. 설명은 조금씩 달라도 이런 전망은 급속하게 현실이 되고 있다. 국경은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런 추세를 뒷받침하듯 수만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세계 각국을 누비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적변경은 일상적인 일이 된다. 국민교육헌장이나 국기 하강식 같은 전체주의 문화의 영향을 덜 받은 젊은 세대일수록 국적변경에 대한 거부감은 옅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국적변경을 했다고 민족이라는 울타리에서 곧바로 이탈해 나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코넬대 석좌교수인 베네딕트 앤더슨은 지난 1983년 자신의 책에서 ‘원격 민족주의’(remote nationalism)라는 어휘를 처음 사용했다. 원격 민족주의란 이민자들이 외국으로 건너가 살더라도 본국에서의 경험과 기억, 습관, 언어 등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가는 경향을 뜻한다. 미주 한인사회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간다. 빅토르 안이 러시아 국가를 부르고 러시아 말을 사용해도 그의 속은 온전히 한국적이다.
또 귀화자로서의 성공은 자신과 후천적 조국의 성취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도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왔던 1세대 이민자 사티아 나델라가 최근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경영자로 임명되자 전 인도가 들썩였다. 미국 언론들도 왜 인도계가 IT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지, 또 미국 대기업을 이끄는 인도계 경영자가 얼마나 많은지를 조명하는 특집기사들을 쏟아냈다.
나델라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빅토르 안의 올림픽 위업 역시 혈연적 모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일조했다. 러시아인들의 한국 호감도는 크게 높아졌으며 빅토르 안 스토리가 미 NBC 방송을 통해 집중 소개되면서 숏트랙 최강국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제는 국적변경을 ‘인력과 인재 유출’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시각이 아니라 ‘민족의 영역과 지경의 확대’라는 플러스적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빅토르 안 케이스를 통해 한국사회의 이런 변화를 확인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내보내는 일뿐 아니라 받아들이는 일에도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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