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새해 다짐은 ‘줄이기’. ‘불필요한 소유물을 줄여가며 살기’를 줄인 말이다. 다짐부터 짧게 줄이고 출발했다. ‘줄이기’가 한번 하고 손을 털 수 있는 다짐이 아니고 보면 용두사미가 되더라도 나약한 의지를 자책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지난 연말부터 아예 방안에 쓰레기통과 서류 파쇄기를 들여다 놓고 작업을 시작했다. 아내의 손을 빌려 손쉽게 할 수 있는 옷장 정리는 일단 뒤로 미루고 적잖은 시간을 요구하는 책상 서랍 정리부터 손대기로 했다. 서랍마다 지난 30여 년간 모은 각종 서류, 스크랩 자료, 사진, 소소한 수집품 따위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손대지 않으면 누구도 손대지 못할 것들이요, 내가 세상을 뜨는 순간 쓰레기로 운명을 다할 나의 소유물들이다.
스크랩 자료의 대부분은 쓰레기로 분류되었다. 옛 서류들도 상당량 파쇄기 속으로 사라졌다. 한 때 소중하게 여겼던 사진들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다는 사실에는 나도 놀랐다. 그러나 살아남아 다시 서랍 속으로 되돌아간 것들도 꽤 있다. 내가 한껏 양보해 낮게 책정한 ‘정서적 가치’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한 것들이다. 하기야 ‘정서적 가치’ 빼면 내 물건들이 도대체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겠는가?서랍 속에서 돌돌 말린 하얀 손수건 한 장이 튀어나왔다. 손수건을 풀어헤치자 담겨있던 이야기가 솔솔 풀려나왔다. 한쪽 귀퉁이에 국화를 수묵화로 그리고 ‘勝’자 낙관을 찍은 손수건이다. 1976년 미국 이민 길에 오르기 전 송별기념으로 받은 것이다.
이민 직전까지 5년 남짓 서울의 한 일간지 기자로 일할 때였다. 청진동에 신문사 동료들과 단골로 드나들던 ‘가락지’라는 생맥주집이 있었다. 십여 개의 테이블에 웨이트리스 두셋이 손님들의 서비스를 맡아했는데 값도 부담스럽지 않고 분위기도 좋아 타사의 기자들도 더러 드나들었다.
승미(勝美) 양은 그 곳에서 저녁시간 일하던 웨이트리스였다. 단골이 된 우리들은 곧 그녀가 서울의 모 대학 의상학과 재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밝고 반듯한 외모에 빈틈없는 행동거지와 재치 있는 말솜씨로 그녀는 신문기자들의 좋은 말상대가 되었다. 그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삼남매의 맏이였다.
나는 자리를 뜰 때면 주머니 형편에 따라 천원 또는 5백 원을 손에 쥐어주고는 했는데 “미안해”하고 말로 때운 적도 적잖았다. 이민 전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집에 가다 ‘가락지’에 들러 케이크의 절반을 승미 양에게 떼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고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가락지’를 찾은 날, 승미 양으로부터 뜻밖의 송별선물을 받았다. 항상 동생처럼 편히 대해준 고마움의 표시라고 했다. 선물은 사군자인 매화, 난초, 국화 및 대나무를 하나씩 수묵화로 그려 넣은 네 장의 손수건이었다. 꽤 갈고 닦은 솜씨가 배인 수묵화였다.
“본래 ‘美’자를 낙관으로 써요. 그런데 손수건에는 ‘勝’자 낙관을 새로 만들어 찍었어요.”내가 그 연유를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혹시 부인께서 오해를 하시면 어쩌나 해서요.” ‘美’를 쓰면 여자한테서 받은 선물로 오해를 사기가 쉽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세심한 마음 씀에 고개를 크게 끄덕여주었다.
미국에 건너온 네 장의 손수건 가운데 매화와 난초는 집 사람에 의해 징발당해 당시 다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께 선물로 전해졌다. 집 사람은 수묵화가 마음에 든다고만 할뿐 손수건의 출처나 낙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목사님이 가끔 그 손수건을 꺼내 코를 푸실 때면 승미 양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그런데 이민 몇 년 뒤 입사동기인 K가 취재차 미국에 왔다가 나와 재회하면서 승미 양이 화제에 올랐다. 내가 출국할 당시 김포공항 출입 기자였던 K가 나를 배웅하고 가던 길에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나를 배웅하고 있던 승미 양을 보았다는 것이다.
정이 요즘보다는 더 귀하게 여겨졌던 시절의 따스하고 정겨운 옛 추억이다. 여전히 작은 정에 연연하는 나의 ‘버리기’는 육체를 버리고 떠나는 날까지 이어질 것 같다. 모으지 않고 살면 버리지 않고서도 살 수 있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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