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을 데리고 과거로 접어드는 12월을 따라 가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달 들어 여러 명의 배우들과 가수가 세상을 떠났다. 9일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오스트리아의 홀아비 귀족 게오르그 본 트랩을 사랑하는 귀족 부인 엘사 역의 미녀 스타 엘리노어 파커가 91세로 사망했다.
12일에는 대중에게 잘 아려지지 않은 2명의 남녀 B급 스타들이 사망했다. 82세로 사망한 탐 래플린은 현대판 웨스턴 ‘빌리 잭’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그가 쓰고 감독하고 주연한 4편의 시리즈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으로 베트남전 베테런인 빌리는 인종차별주의 무법자들을 합기도로 때려누이는데 이 무술 실력은 한국의 한봉수 사범에게 사사한 것이다.
래플린과 같은 날 95세로 사망한 오드리 토터는 투계장의 금계처럼 독이 오른 아름다움과 도전적 자태를 지닌 여자로 여러 편의 필름 느와르에서 남자 잡는 팜므 파탈로 나왔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로버트 몬고메리가 작가 레이몬드 챈들러의 주인공인 사립탐정 필립 말로로 나오는 ‘호수 속의 여인’과 로버트 와이즈가 감독한 사기 권투영화 ‘셋-업’.
14일에는 심장을 파고드는 비수의 감촉과도 같은 새파란 눈을 지닌 아일랜드 태생의 연극 영화배우로 약간 비웃는 듯한 입술을 한 피터 오툴이 81세로 사망했다. 내 여동생이 어릴 때 짝사랑하던 오툴은 카리스마가 있는 술꾼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대뜸 세계적 스타가 됐다. 내가 처음 그의 눈을 보고 아찔한 경련을 일으켰던 영화는 조셉 콘래드의 동명 해양소설이 원작인 ‘로드 짐’이었다.
미녀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오툴은 생애 모두 8번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으나 매번 고배를 들고 생애업적상으로 만족해야 했다. 나는 몇 년 전에 선셋의 한 호텔에서 있은 연말파티에서 백색 옷을 입어 더 창백해 보이는 수척한 얼굴을 한 오툴을 만났었다. 푸르다 못해 회색빛이 나는 눈동자에 이끌려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누면서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이 바다의 침묵처럼 슬퍼보였다.
15일에는 히치콕의 두 영화 ‘레베카’와 ‘의혹’으로 유명한 영국 태생의 조운 폰테인이 96세로 사망했다. 우아하고 조용하며 불안감에 떠는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폰테인은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로렌스 올리비에(‘레베카’)와 오손 웰스(‘제인 에어’)같은 고집 세고 오만한 남자들의 로맨틱한 상대역을 했다. 남자의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하는 ‘댐즐 인 디스트레스’이면서도 터프 가이들에게 맞설 수 있는 내적 힘을 지닌 여자였다.
그런데 ‘의혹’으로 오스카 주연상을 탄 폰테인은 역시 오스카상을 두 번이나 받은 한 살 위 언니로 현재 파리에 살고 있는 올리비에 디 해빌랜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멜라니 역)와 앙숙간이어서 수십년간 서로 대화 없이 지냈다.
12월에 사망한 연예인들 중에 내 마음을 가장 쓸쓸하게 만들어준 사람은 컨트리 싱어 레이 프라이스(사진)다. 프라이스는 16일 87세로 텍사스에서 숨졌다.
프라이스하면 대뜸 생각나는 노래가 ‘포 더 굿 타임스’다. 이 노래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작곡했는데 프라이스가 발라드풍으로 해석해 크루너식으로 부르는 CD를 그의 사망소식을 듣자마자 꺼내 들었다. 차분하고 약간 비음이 섞인 음성으로 님을 보내는 얘기다.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요/난 그 것이 끝난 줄 압니다/그러나 삶은 계속되고 이 차가운 세상은 여전히 돌아갈 것입니다/우리 그저 이 시간들을 함께 보냈다는 것만이라도 기뻐합시다/중략/당신의 머리를 내 베개 위에 누이고 당신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몸을 내 가까이에 놓으세요/중략/난 살아갈 것이며 당신은 다른 사람을 찾게 되겠지요/그러나 행여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다고 여길 경우 나는 여기 있을 것입니다.’
내일이면 사랑하는 여자가 떠나가는 것 같은데 노래를 듣자니 체념이 어제 잘 못 마신 술처럼 가슴에서 내려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어 꼭 체할 것만 같다. 며칠 전 나는 내 친구 C의 집에서 연말을 보내는 저녁과 술을 들면서 친구와 함께 유튜브로 이 노래를 들으며 둘이 같이 “아, 하”하면서 떠나고 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초기 컨트리 뮤직인 피아노가 깨진 소리를 내는 홍키-통크 뮤직을 훨씬 부드러운 내슈빌 사운드와 섞어 대중화시킨 프라이스의 넘버원 빅 히트곡은 ‘크레이지 암즈’다. 이 노래는 무려 5개월간 컨트리 차트 1위를 차지했는데 ‘포 더 굿 타임스’를 비롯해 다른 모든 컨트리송처럼 고독과 상심과 떠나간 여자가 그립다고 징징 울어대는 남자의 한숨이다. 정신들 차려!프라이스가 부른 또 다른 노래들로는 ‘핫에익스 바이 더 넘버’ ‘디 아더 우먼’ ‘버닝 메모리즈’ ‘헬프 미 메이크 잇 두루 더 나잇’ 및 ‘소프트 레인’ 등이 있다. 세월이 가니 너도 가고 나도 가고 다들 가는구나. 해피 뉴이어!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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