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자 한려수도 연안의 작은 항구도시 통영에 유명 예술인을 숱하게 배출한 이름에 걸맞게 악극단과 전문 연극단 그리고 국극단이 두세달이 멀다하고 찾아 왔다. 그리고는 이들 극단의 공연은 무대공연 전용극장인 봉래극장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악극단의 공연 때마다 어김 없이 봉래극장 배란다에서는 손님을 끌기 위해 내가 어릴 적에 들었던 그 서커스 악사들이 부르던 그 서커스의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한 악극단 공연 때 주연 여자 배우의 갑작스런 발병으로 대역(代役)배우를 쓴 게 연극을 망치고 흥행에 실패하자 지난 날 서커스 소녀처럼, 미묘의 한 여배우를 여관비 대신 인질 잽힘 당하기도 했다.
나도 이들 극단이 공연한 이 봉래극장에서 무용발표회 4번, 중학 때 연극제 2번, 그리고 6.25 피난시절에 5차례의 연극공연 등 11번이나 공연한 적이 있다. 그런데 중국 극작가 ‘조우’의 뢰우(雷雨)공연에서 크게 사단이 나고 말았다. 이 연극은 6.25 전 해에 국립극장 창립공연으로 막이 올려져 크게 힛트한 연극이다. 그때 나도 그 국립극장 객석에 앉아 구경하면서 언젠가는 통영에서 꼭 막을 올려 보리라고 마음 먹었었다.
6.25가 터지자 국립극장장이었던 유치진 선생과 그 연극의 연출을 맡았던 허남실 선생이 통영에, 역시 그 연극의 장치를 맡았던 강성범 선생이 부산에 피난 와 계셨다. 나는 통영에서의 뢰우 공연을 결심 하고는 강 선생을 부산에서 모셔 왔다. 그리고는 이분들에게 감수(監修)와 연출, 장치를 부탁했다. 한편 이 연극의 주인공인 주평(周萍, 후일에 내 필명이 된 朱萍)역을 내가 맡는 한편, 제작비 또한 내가 마련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자 연기자 말고는 국립극장 무대를 고스란히 통영에 옮겨 놓은 듯한 이 공연에 좁은 통영 바닥이 들석거리기 시작 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 첫날 봉래극장에는 관중들이 구름같이 몰려 왔다. 그런데 좋은 일에 마가 끼인다고 분장시간이 지났는 데도 내 상대역 여자 주역인 S양이 나타나지 않는다. 개막 30분도 지나고 1시간이 지나자 객석에서 “막 올려라!” 라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분장을 한 채로 무대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한 여자 연기자에게 돌발 사고가 발생해 오늘 공연의 막이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돌아 가시고, 내일 공연에 다시 와 달라!” 고 용서를 빌고서야 겨우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우리는 증발한 S양 찾기에 나섰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아침, 무슨 까닭에선지는 몰라도 앞으로 일어날 엄청난 파장에는 아랑곳 없이 S양을 나꿔채 간 그녀의 애인과 S양이 숨어 있는 그들의 은신처에서 S양을 데려와 둘째날 공연이자 마지막 공연을 자리가 없어 입장 못한 손님들의 아우성과 항의 속에 겨우 치루었지만 공연 성공과는 달리 재정적인 적자가 화산 폭발 후의 분화구 같이 입을 크게 벌리고 나에게 다가 오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달간의 합숙연습으로 빚진 여관 빚은 20대 중반의 나로서는 메꾸기 힘든 구멍이었다. 그러자 나도 그 서커스 소녀 같이 또 악극단 여배우 처럼 여관 뽀이(심부름꾼)로 인질 잡힌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집을 내 손으로 터는 대도(큰 도둑)로 변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아버지께서 연극하는 내 꼴이 보기 싫어 다른 때와는 달리 2주째 어장막에서 통영에 올라오지 않는 기회를 찬스라 싶어 우리집 창고의 자물통을 부수고 연말에 팔아 세금 낼려고 쌓아둔 멸치 100여 포대를 내다 팔아 여관빚을 갚고는 그 여관 구석방에서 숨어 있었다.
어장막에서 올라와 텅빈 창고 안을 들여다 본 아버지가 어머니로부터 자초지종을 알아 내고는 당장에 나를 끌고 오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나의 은신처를 알고있는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여관으로 왔다. 내가 안 가겠다고 버티자 어머니가 울먹이며 나에게 “니가 버티면 니죽고, 내 죽는다” 라고 말했다. 내 잘못으로 어머니까지 고통 받게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집 대문을 들어서자, 활활 타오르는 장작개비 위에서 내 옷과 책이 타는 화형식이 이미 치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마당에 꿇어 앉아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불 붙은 장작개비로 나를 내려치려 하다가 딱 멈추고는 불 붙지 않은 장작개비를 주워 들고는 나에게 “일어 서!” 라고 하셨다. 그래도 일어서지 않자, “그래도 못 일어 나?” 라고 소리 치셨다. 내가 일어서자, 내 엉덩이와 허벅지를 몇 차례 내리 치셨다. 내가 퍽 주져 앉자 아버지는 대문 밖으로 나가 버리셨다.
그로부터 2년 쯤이 지난 어느 날, 성경 속의 탕자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지만 현실 속의 탕자인 나는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극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 서울로 도망 치다 시피 내빼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때로부터 또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내 카세트 프레이야에서는 옛날 듣던 그 서커스의 노래가 흐르고 있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 마다 그 서커스 소녀와 인질 잡힌 악극단 여배우, 그리고 아버지와 얽혔던 사연들을 생각한다. 그 중에도살아있다면 내 나이 쯤일 그 서커스 소녀가 서커스 인생의 말로가 그러하듯 끝내 불행한 삶을 살다 갔을까 하는 염려가 가시가 되어 내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그 날 불 붙은 장작개비로 내 머리나 등짝을 내리치시지 않으시고 끝내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엉덩이와 허벅지를 때리시던 아버지의 그 부정(父精)의 고마움이 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못다 부른 ‘청개구리의 애가(哀歌)’를 이렇게 부르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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