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rtue is not left to stand alone. He who practices it will have neighbors.
덕(德)은 외롭게 홀로 남겨지지 않는다. 덕(德)을 행하는 자에겐 이웃이 있는 법이다.
‘neighbor’[네이버]는 가까이[near] 머무는[dwell] 사람, 즉 ‘near dweller’를 뜻하는 영어단어입니다. 심신 안팎으로 가깝게 머무는 사람이 내 이웃입니다. 바로 옆집에 살아도 ‘가까운’ 인사를 못 나눈다면 그 분은 이웃이 아닙니다. 멀리 살더라도 늘 마음 ‘가까이’ 있다면 그 분이야말로 진정한 이웃입니다.
그런 이웃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필경 ‘덕(德)’이 있는 사람일 터입니다. "덕불고필유인(德不孤必有隣)!" 까까머리 중학생 때 고전(古典)을 배우며 가슴 속 깊게자리한 공자님 말씀입니다. 당연하지! Of course! 그렇게 또렷하고 자명하게 알아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어느덧 훌떡 넘기고, 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의 경지를 넘나들어야 할 요즈음, 이 말씀이 왠지 심상치 않게 들립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나의 이웃들은 누구인가? Who are my neighbors? 덕(德) = 바른[直] + 마음[心]. 덕은 곧고 바른 마음으로 행[行]하는 겁니다. "덕불고필유인(德不孤必有隣)!" 덕을 행한다 함은 곧 바른 마음, 즉 양심(良心)대로 사는 걸 말합니다. 양심은 우리 안의 거룩한 실존입니다. 성스러운 영혼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그게 바로 양심일 겁니다. 악(惡)의 달콤한 유혹이 다가올 때, 하늘에서 곧바로 내려온 마음인 직심(直心, 德)을 견지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우리 모두 안의 성령이신 양심 덕분입니다.
Virtue is not left to stand alone. He who practices it will have neighbors.
덕(德)은 외롭게 홀로 남겨지지 않는다. 덕(德)을 행하는 자에겐 이웃이 있는 법이다.
저희들 모두 안에 고루 하나씩 들어있는 양심은 미상불 보혜사(保惠師, paracletus, 파라클레투스)이기도 합니다.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거룩한 실존입니다. 우리가 알아채든 또는 부지불식간이든 보혜사는 늘 보혜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저희들에게 보내신다는 성령도 보혜사요, 이미 저희 안에 들어와 계시는 양심도 보혜사입니다. 알고보면, 양심이 곧 거룩한 영혼의 실존입니다. 성령의 곧은 마음인 ‘덕(德)’과 에고의 지어낸 마음인 ‘아심(亞心, 惡)’을 신통하게 잘도 구별해 내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 그게 바로 우리 안에 늘 양심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내 양심은 또 남의 양심을 정확하게 살펴 냅니다. 내 욕심이 남의 욕심을 잘 집어내듯이, 내 양심 또한 남의 양심을 잘 헤아립니다. 측은지심이 없고 무례한 사람을 보면, 내 안의 양심이 그 사람의 ‘양심 없음’을 간파합니다. 정의감 없이 행동하고 사태파악이 둔한 사람, 한마디로 ‘전혀 개념없는 인간’을 보면 내 안의 양심이 경종을 울립니다. "Watch out!" 조심하라! “Be careful!” 그렇게, 내 양심은 늘 ‘나’를 보호합니다. 그래서 보혜사입니다.
내 욕심이 과하거나 내 에고[ego]가 탐진치에 휘둘릴 땐, 양심은 고즈넉하게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yes/no의 분명한 사인을 보냅니다. 해서는 찜찜한 일을 결국 못하게 하는 힘. 하기 힘들어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기어코 하는 힘. 불의를 보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야 직성(直性)이 풀리는 원리. 내 일도 아닌데 굳이 참견하고 바른 길로 이끌어야 시원해지는 원리. 이게 모두 양심의 길이요 덕이 이끄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이웃이 없을 리 없습니다. 양심이 양심을 꺼릴까요? 양심대로 사는 사람이 외로울 수 있을까요? 이웃의 다른 양심들이 그런 양심을 가만히 놔 둘까요?
Virtue is not left to stand alone. He who practices it will have neighbors.
덕(德)은 외롭게 홀로 남겨지지 않는다. 덕(德)을 행하는 자에겐 이웃이 있는 법이다.
사실, 진정한 이웃은 단 한 분이어도 족합니다. 친구가 많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닙니다. 몇 안되는 이웃이라도, 마음이 통하고 영(靈)으로 교분한다면 그들이야말로 진짜 이웃입니다. ‘웃는 얼굴 다정해도’ 양심이 어둡고 직심이 구부러져 있다면, 그런 사람은 진짜 이웃이 아닙니다. 직심(直心)은 직심을 알아 봅니다. 내 욕심이 남 욕심을 바로 알아채듯이, 내 안의 거룩한 성령이신 양심은 ‘나’라는 제한된 경계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 안의 양심도 훤하게 알아채고 계십니다.
그러니, 당연하죠. 덕은 외로울 수가 없습니다. 직심을 알아보는 다른 직심들이 존재하는 한, 직심으로 덕을 행하는 사람에게 이웃이 없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덕불고필유인(德不孤必有隣)!" 오래 전에 꽃힌 말씀이 오늘 아침 불현듯 다시 꽃히면서, 부덕함의 소치란 과연 무엇인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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