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문다. 지난 시간은 그 무수한 날들의 갈피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들과 사건들을 담고 있다. 불쑥불쑥 많은 기억들이 떠오를 지라도 지나간 시간은 역시 짧고 허망한 느낌이다. 요즈음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길어진 것을 생각해 볼 때 남은 시간은 까마득하게 여겨진다.
아침에 베니를 데리고 산책을 하면서도, 요즈음 베스트셀러인 책들을 읽으면서도 마음은 나에게 주어진 2막의 주제를 무엇으로 정하여 시작할 것인지 궁리하고 있다. 지난 한 해를 그렇게 보냈지만 아직도 ‘이것이다’ 하는 것을 정하지 못하고 탐색만 계속하고 있다.
지금 여든 가까이 되시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공통된 주장이 있다. 이토록 주어진 시간이 많을 줄 알았으면 체계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서 나이에 어울리는 숙련된 기술을 익히거나 정말 공부해보고 싶은 새로운 분야의 학문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넓혔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말씀이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시간은 황금보다 귀하다. 아이들이 커나갈 때 가장 많이 한 잔소리가 ‘시간 낭비하지 말라’였다. 그러니 허투루 보내는 시간에 대해 조바심이 나지만 한번 결정하면 그것이 남은 제 2막을 좌우하기에 신중하게 궁리를 하고 있다.
일터가 한가했던 지난달과 이번 달 나의 독서 목록은 신앙서적 두세 권과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 노벨상 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두 권, 그리고 마틴 게이퍼드가 쓴 데이빗 호크니의 그림 세계에 대한 대담집 ‘다시, 그림이다’ 등 열권이 넘는다. 그 중 내 마음을 사로잡고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었던 것은 화가 호크니가 하는 말하는 그림 그리기 작업에 관한 것이었다. 지난달에 읽었던 곰브리치의 ‘예술과 환영’도 미술에 대한 식견을 넓혀주었으며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미국에 와서 제일 처음 만난 화가가 데이빗 호크니였다. 남편의 대학원 공부로 미국에 온 것이 1986년도였다. 남편은 공부로, 나는 일로 분주하고 피곤한 심신의 반작용으로 라크마(LACMA)를 들렸는데 마침 호크니의 특별전시가 있었다.
영국사람 호크니가 이곳 LA에 와서 느낀 기후나 문화적 환경에 대한 감정들이 그림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내가 미국 와서 느낀 그런 생소함의 감정들과 너무 똑 같아서 단박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뒤 도로시 챈들러 극장에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무대미술로서도 호크니의 예술세계를 만났었다. 라크마의 ‘호크니 초상화전’도 관람했다. 그의 그림은 우리집 가족실에도 두 개 걸려있다. 물론 복제 인쇄그림이다. 이처럼 현존 화가 중에서 내게 가장 친숙한 화가가 호크니이다.
화려한 화면, 사물의 독특한 해석으로 그림을 그린 호크니의 작품을 볼 때 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절로 생긴다. 마치 ‘너도 그려봐. 멋지고 황홀한 경험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손으로 하는 것은 청소부터 시작해서 모조리 젬병이다. 손으로 줄을 긋는 것조차도 서툴다. 어릴 때부터 왼손으로 무얼 하는 걸 보고는 엄마가 어설프다며 타박을 많이 하신 탓에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신이 없다.
그런데 이젠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한 쟁이가 되어보고 싶은 욕심이 어처구니없게도 생긴다. 거창한 일로는 도자기를 굽는다든가, 목공일을 한다든가, 가죽구두와 가방을 솜씨 좋게 만든다든가 하는 일들이 있고, 우선 청소라도 초보의 딱지를 떼고 싶다.
지난여름 막내가 대학을 졸업했으니 아이들을 부양하는 책임에서 벗어났다. 더 이상 자녀를 돌보는 데 시간을 쓸 이유도 경제적인 책임도 없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할 이유는 없다. 인생이라는 ‘초컬릿 상자’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남에게 보이고 평가받기 위해서 조바심을 내가며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다. 그냥 시원스럽게 물감을 찍어 캔버스에 쓱싹쓱싹 칠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이처럼 홀가분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는 날이 온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러가지 다양한 선택이 앞에 있다 보니 오히려 괴로운 것을 깨닫는 나날이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