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老스님이 수행하고 있는 토굴에서 나와 앉아 모처럼 한가하게 짧아가는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아랫 마을에 사는 한 보살님이 햅쌀 한 봉지와 고구마를 몇개 삶아가지고 와서 스님 앞에 내려 놓고 합장으로 인사한다. “스님, 좋은 법문(法文) 하나 해 주세요.” 그러자 노스님은 “좋은 법문이 따로 있나? 소리 있는 소리만 들으려하지 말고 소리 없는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하네. 가만히 있어 봐라. 새들도 이야기하고, 바람도 이야기하고 산도 이야기하고 낙엽도 이야기하잖아? 잘 들어 보시게. 이게 바로 법문이네.”
조선 선조 임금 13년 송강가사, 관동별곡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정철(鄭澈)이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작별을 아쉬워하는 몇이 모여 정철을 환송하는 조촐한 모임을 가진다. 주빈인 정철과, 정전(正殿)에서 신랄하게 정철과 각을 세우던 심희수(沈喜壽), 이순신을 천거하고 임진란 때 영의정으로 나라를 구하는데 큰 역활을 하게되는 유성룡(柳成龍), 대 문장가로 정사(正使) 이항복을 따라 부사(副使)로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궁지에 몰린 선조를 변호하는데 큰 역활을 하게되는 이정구(李廷龜). 그리고 이항복(李恒福 ) .
모두 당시 학문과 직위가 쟁쟁한 대신들이다. 비록 동인이다 서인이다 해서 정파가 다르고 정견이 달랐지만 풍류를 사랑하는 남자들끼리의 한잔 하는 모임이 아닌가. 술이 몇 순배 돌고 흥이 도도해 지면서 누군가 의견을 내었다. “세상에서 들리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시제(詩題)를 가지고 한 구절씩 시를 읊어 봅시다.” 모두 찬성하자 정철이 먼저 운을 뗏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맑은 밤 밝은 달 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의 소리 (淸宵朗月 樓頭遏雲聲 청소낭월 누두알운성).”
그러자 심희수가 다음을 받았다. “온 산 가득 찬 붉은 단풍에,먼 산 동굴 앞을 스쳐서 불어 가는 바람 소리 (滿山紅樹 風前遠岫聲 만산홍수 풍전원수성)” 유성룡은 “새벽 창 잠결에 들리는, 아내가 작은 통으로 술을 거르는 그 즐거운 소리 (曉窓睡餘 小槽酒滴聲 효창수여 소조주적성)”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란다.
이정구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산골 마을 초당에서 도련님의 시 읊는 소리 (山間草堂才子詠詩聲 산간초당 재자영시성)”를 꼽았다.
실화(實畵)는 어떤 사물을 보면서 그대로 그리는 그림이다. 반면에 심화(心畵)는 마음에서 떠오르는 영상을 붓으로 잡아 그리는 그림이다. 그래서 우리 전통의 사군자 묵화(墨畵)에서 처럼 심화는 굳히 사실에 억매이지 않고 사유(思惟)의 세계를 거리낌 없이 넘나든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심화의 그윽한 경지에서 “세상에서 들리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읊은 것이다. 귀로 들은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은 것이다.
모두 시정(詩情)에 젖어 잔잔한 감동으로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있을 때 모처럼의 분위기를 깬것은 장난기와 해학에 넘치는 이항복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바로, “깊숙한 골방 안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 (洞房良宵 佳人解裙聲 동방양소 가인해군성)” 란다.
아! 저런,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모두 유학을 궤범(軌範)으로 살아가는 점잖으신 분들이다. 그리고 당대에 내노라하는 대학자들이요 문장가들이고 정사를 좌지우지 할만한 정치가들 아닌가? 그런 분들이 지금 수준 높은 문학을 읊고 계시는데 감히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라니! 실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자리에 모인 모두는 이항복의 ‘여인이 치마 벗는 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고 입을 모으고 칭찬했다. 이항복의 표현이 음란스럽기 보다는 그윽한 정감과 풍류가 좋았던 모양이다.
내가 이곳 Rosemoor 에 이사와서 처음 만나는 가을이다. 창가에 기대 앉아 귀를 기울여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가을 단풍의 붉은 색 아름다움이, 밟히는 낙엽의 나직한 음성이 정겹고 따사롭다. “나에게 한 권의 경(經)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이룬 것이 아니로다. 활짝 펴 놓아도 글자 하나 없건만 항상 큰 광명이 여기서 퍼져 나가노라” 어느 선가(禪家)에서 만난 글이다. 글이 없는 책, 줄이 없는 거문고.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는 이렇듯 마음으로 듣는 속삭임이다.
동네 앞길에서 따다가 놓은 홍시감처럼 가을이 빨갛게 탐스럽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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