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온것을 피부로 느낄 때는 아침 저녁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나무 잎새들이 색색으로 바뀌는 단풍을 볼 때이다. 우리집 주변에 둘러 싸인 나무들도 어느샌가 노란색과 주홍색, 빨간색으로 옷을 바꾸어 입었다. 계절이 별로 바뀌지 않는 것 같은 캘리포니아에서도 이쯤엔 가로수나 얕은 산들 주변에 단풍이 들어, 보는 사람들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
요즘 딸네 집에 들를 때마다 나를 신나게 하는 것은 단풍 뿐만 아니라 그애 집 주변에 빼꼭이 들어찬 참나무에서 도토리들이 떨어져 집 주변을 둘러싼 댁에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볼 때다. 도토리들이 엄지 손가락만큼 굵고 실해서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요즘엔 그것들을 줍기에 나와 꼬맹이들은 신이 난다.
세살배기 니코와 다섯살 짜리 데니엘은 내가 오기 전부터 미리 저희들의 작은 바구니에 먼저 도토리들을 주워 담았다가 내가 오면 자랑스레 그것들을 보여준다. 사실 작년에도 수북히 모아 두었지만 도토리 묵을 쑬 줄을 몰라서 포기하고 우리집 주변에 동물들이 다니는 곳에 그들의 양식을 위해 뿌려 두었었다.
도토리 묵을 쑬 줄 아느냐고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 보아도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올해는 오기가 발동해서 어떻게든 그 실한 도토리로 묵을 한번 쑤어 보자고 마음을 다 잡았다. 사실 도토리는 그 껍질이 단단해서 깨기가 문제였는데 우연히 몇개의 도토리 가운데 껍질이 벌어진 것이 있어 까보니 훨씬 쉬웠다.
나는 도토리가 담긴 바구니를 창가에 두었더니 며칠이 지나자 껍질이 벌려지는 것을 발견하고, 우선 껍질 벗긴 것들만 골라 내어 물에 담가두었더니 블렌더에 갈기가 쉬웠다.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지만 나는 생전 처음 블렌더에 간 도토리를 채에 받쳐 물을 붓고 저어 주었더니 해맑은 갈색의 진한 물이 나와서 그것으로 약한 불에서 약 십분간 끓이니 묵이 만들어졌다. 한시간 쯤 지나니까 그것이 단단하게 되어 맛을 보니 쌉쌀한게 제법 도토리 묵 맛이 나는게 아닌가!아무튼 생전 처음 시도한 도토리 묵이 제법 제대로 만들어졌다는게 신기해 나는 오늘 그리 대단할 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들떠 행복해졌다.
며칠 후엔 남은 것들로 잘 만들어서 주위의 친구들에게 맛을 보여야겠다. 예전엔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건강식으로 떠올라서 한국엔 도토리 묵만 만들어 파는 식당이 늘 만원이다. 칼로리가 적고 담백해서 인기다.
내가 대여섯살이던 일정시대 무렵, 우리 가족은 약 이년쯤 황해도 연백군에서 살았는데 그때 어느 가을날 엄마, 큰 언니와 함께 구월산이라는데를 하루종일 걸어가서, 밤도 줍고 도토리도 줍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그들은 모두 떠나고 나는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먹어 손주들과 함께 도토리를 줍는다.
또 어느날 내가 아이들 곁을 떠났을때, 우리 손주들은 할머니를 기억하고 그리워할까. 바람이 불자 낙엽들은 우수수 떨어지고 이리저리 흩날리는 것을 보자 우리네 인생도 저 흩날리는 낙엽과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이 스산해진다.
사람들은 떠나고, 또 태어나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또 새봄이 오면 새해는 또 어떤 얼굴로 와서 우리들의 삶을 채색할까.
요즘은 일주일이 너무 빨리 지나서 정말 칠십대는 칠십 마일로 달린다는 말이 실감된다. 며칠 전엔 보름달을 바라보며 친구 셋이서 밤의 적막한 콜프코스를 걸었다. 낮에만 골프코스를 보다가 밤에, 그것도 환한 달밤에 보니 새로운 맛이 난다. 작은 호숫가에 모여 있던 오리떼들이 놀라 후다닥 달아난다. 길게 뻗은 미루나무, 소나무들, 단풍나무들이 달빛 아래 멋진 실루엣을 만들면서 우리를 반긴다. 숲속에 자리 잡은 작은 집들의 창에선 따뜻한 불빛이 비치고 그 속엔 아마 행복한 사람도, 또 슬프고 외로운 영혼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것이 인생이다. 우리의 얼굴이 다르듯 사람들의 사는 모습도 다 다르다.
우리가 사는 라스모어에 육통권이란 중국계 운동이 있는데 올해는 더 사람들이 늘어난 중에 유독 한국인들의 수가 늘었다. 많이 모이면 약 오십명이 넘는데 한국인들이 십여명이 넘어서 내가 우스개 소리로, 중국인들에게 ‘좀 있으면 우리 한국인들이 너희 중국인들을 추월할지도 몰라!’하고 말하면 그들은 그냥 싱긋이 웃는다.
운동이 끝나면 그날 스케줄에 따라 함께 맥도날드로 몰려가 커피도 마시고 재미있는 잡담도 나눈다. 요즘은 남편 수난시대가 되어서 은퇴하면 남편은 공짜 박물관이나 기웃거리고, 공짜 점심을 먹을 수 있으면 그날은 횡재한 날이고, 사모님들은 동창회를 해외 크루스를 나갈 정도로 그 차별이 심하다는 얘기도 하면서 함께 크게 웃었다.
함께 웃으면 엔돌핀이 몇배 더 나온다는 말도 있다. 늙어서 필요한 것은 좋은 음식과 운동과 수질이 좋은 물과 따뜻한 햇빛과 맑은 공기와 적당한 휴식, 그리고 믿음이라고 어느 의사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첨가한다면 적당하게 할 수 있는 일과 친구들이다. 단 오분이면 만나고 싶은 친구들을 거의다 만날 수 있다. 얼마나 복된 일인가! 내가 얼마나 더 도토리 줍기를 할 수 있을지 나도 모른다. 건강한 삶은 그때 그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찰나를 즐기는 것이다. 내가 딸네를 찾을 때마다 ‘끄랜마!’하며 달려 나오는 귀여운 손주들이 있는 한, 아마 나는 행복한 할머니로서 또 도토리 줍기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도토리 줍기는 행복을 줍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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