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란의 선배격인 포크송 가수 데이브 밴 롱크의 삶을 그린 코엔 형제 감독의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의 프레스 정킷 차 들른 지난 금요일 뉴욕은 유엔 총회가 열려 교통지옥이었다. 공항에서 숙소인 맨해턴 54가의 런던호텔까지 가는데 2시간 가까이 걸렸다. 내 방 번호는 3901.
잠비아 국가대표의 숙소인 센트럴팍 맞은편 리츠 칼튼 호텔 앞에서는 ‘정치범 석방하라’는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뉴욕 태블로이드에 의하면 지난 주말 시내 스트립 조인트는 외국 귀빈들로 초만원을 이뤘다고 한다.
이번 뉴욕 길에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타임스스퀘어 근처 타운홀에서 열린 포크송 컨서트에서 조운 바에스의 노래를 들은 것. 컨서트에는 바에스 외에도 패티 스미스, 잭 와이트, 마커스 멈포드 및 엘비스 코스텔로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참석했다.
음반으로만 듣던 저항가수 바에스가 부르는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을 듣자니 그의 곡을 하는 듯한 창법에 초혼 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옷의 잿빛머리에 작은 체구의 바에스는 72세의 나이에도 정열적이요 아름다웠다.
LA로 돌아오는 기내에서 잠이 안 와 클래식 영화를 고르는데 히치콕의 컬러풀한 스파이 스릴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가 보인다. 생각 없이 골랐는데 영화가 유엔 총회가 열리는 뉴욕에서 시작해 내가 이 도시에서 머물렀던 때와 타이밍이 딱 맞는다.
심술첨지 히치콕이 좋아하는 오인된 신분 때문에 영화 내내 쫓기는 남자의 얘기로 두 주인공인 회색 정장의 신사 케리 그랜트와 금발의 우아하게 섹시한 에바 마리 세인트처럼 스타일 멋있는 스릴러다.
히치콕 단골의 작곡가 버나드 허만의 불협화적인 음악과 그래픽 디자이너 솔 배스의 현대적인 오프닝 시퀀스 타이틀 끝에 히치콕이 버스를 막 놓친 사람으로 캐미오 출연한다. 이어 광고회사들이 즐비한 매디슨 애비뉴의 광고회사 고급 간부인 로저 손힐(그랜트)이 비서와 함께 퇴근 인파로 붐비는 빌딩을 나와 택시를 타고 두 불락밖에 안 떨어진 플라자 호텔 59가쪽 센트럴팍 건너편 문 앞에 내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손힐은 호텔의 오크바에서 마티니 한잔 마시며 손님들과 얘기하려고 왔다가 엉뚱하게 미국 스파이 조지 캐플랜으로 오인돼 외국 스파이들에게 납치된다. 이들의 두목은 제임스 메이슨. 이어 무대는 총회가 한창인 유엔 본부와 그랜드 센트럴 역과 시카고와 인디애나의 시골을 거쳐 사우스다코타의 마운트 러시모어에서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속도감 있고 스릴 있는 이 영화는 어네스트 레만이 쓴 각본이 매우 위트 있고 유머러스한데 특히 성적으로 은근짜를 놓는 대사가 슬그머니 자극적이다. 유엔서 살인범으로 몰려 그랜드 센트럴에서 시카고 행 열차 20세기 호에 숨어든 손힐을 숨겨주는 여자가 정체불명의 금발미녀 이브 켄달(마리 세인트).
손힐과 켄달이 열차 내 식당에서 마주앉아 주고받는 대사가 기차게 아리아리한 성적 매력을 분사한다. 특히 인류 최초의 유혹녀인 이브의 이름을 딴 켄달이 손힐의 얼굴이 “나이스하다”면서 “밤은 긴데 읽기 시작한 책이 별로 재미가 없어요”라며 손힐을 유혹하는 장면이 짜릿짜릿하다.
켄달은 또 “저는 공복에는 결코 사랑에 관해 얘기 안 해요”라고 손힐에게 음식을 권하는데 이 대사는 당초 “저는 공복에는 결코 섹스를 안 해요”였으나 검열이 염려돼 바꿨다. 이어 켄달은 “디저트는 먹지 말라”고 덧붙인다. 섹스에 지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26세라기엔 너무나 완숙된 켄달은 이렇게 손힐을 유혹하면서 그에게 자기 침대칸 방 번호를 가르쳐 주는데 3901. 손힐이 이에 “나이스 넘버”라면서 “기억하기 쉽네”라고 응수하는데 난 그 번호가 내가 묵은 런던 호텔의 방 번호와 같다는 것을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깨달았다. 우연치곤 복권에 당첨될 만한 우연이다. 집에 돌아와 이 번호로 복권을 샀다.
영화에는 기총소사로 공격하는 살충제 살포용 경비행기를 피해 손힐이 수확이 끝난 옥수수 밭 속으로 도주하는 장면과 시카고의 경매장 내 해프닝 그리고 마운트 러시모어의 도주와 추격(사진) 등 잊지 못할 장면이 많다. 몇 번씩 봐도 물리지 않는 흥미진진한 명화다.
그런데 히치콕은 늘 마운트 러시모어의 대통령 얼굴 위에서의 추격과 도주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제목도 ‘링컨 코 속의 남자’로 할 생각도 있었다. 실제 영화 제목은 히치콕도 말 했듯이 별 의미가 없다.
영화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 것은 옛날만 해도 호텔 손님의 방 번호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는 점. 손힐이 플라자(현재 개보수 중)의 교환에게 조지 캐플랜의 방 번호를 물으니 “796호”라고 알려준다. 내가 묵은 런던 호텔에서는 교환에게 할리웃 외신기자협회 동료회원의 방 번호를 대고 전화를 돌려달라고 해도 그 방 손님의 이름까지 대라고 요구했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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