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물을 마셔버리기로 결단을 내린지 훌쩍 석 달이 지나갔다. 그런데도 5갤런 들이 플라스틱 통의 물은 겨우 반밖에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하루 평균 5백 밀리리터 병 물 3병을 마시니까 한 달이면 5갤런 물통 둘을 거뜬히 비웠어야 계산이 맞는다. 그렇다고 내가 공짜 물을 아껴가며 마셨느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다. 그 동안 병 물을 계속 사서 마셨으니까.
내가 공짜 물과 첫 대면한 것은 지난 5월 초순 어느 주말이었다. 아내와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문 앞에 5갤런 들이 플라스틱 물통 2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물통에 ‘Sparkletts’ 상호가 선명히 새겨져 있고 플라스틱 안전마개는 스티커로 봉인되어 있었다. 나는 병 물을 사다 마시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아내가 물 배달을 주문한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아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오히려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곧 누구도 물을 주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달 사고 아니겠어. 그대로 놔두면 곧 배달부가 도로 찾아가겠지.”나의 판단에 따라 주인 잃은 물통 둘은 우리 집 문 앞에서 배달 사고를 낸 배달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안에 물통이 제 주인을 찾아 떠나리라 나는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두 물통은 제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었다. “좀 더 지켜보지” 하며 슬슬 미루다 보니 한 달이 휙 지나갔다.
“물통을 무한정 문 앞에 방치할 수도 없고… 멀쩡한 음료수인데 우리가 마셔버리지.”그러나 아내는 쉽사리 동의하지 않았다. 찜찜해서 마시지 못하겠다는 거였다. “도대체 뭐가 찜찜한데?” 호기롭게 한마디 던졌지만 실은 찜찜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만있자… 각박한 요즘 세상에 어느 누가 제 정신 같고 음료수 10 갤런을 공짜로 돌려. 선전용? 말도 안 되는 소리지.”예까지 생각이 미치자 찜찜한 느낌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맞아! 어느 놈이 우리를 해코지하려고 음모를 꾸몄을 지도 몰라!”독극물로 오염된 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찜찜한 느낌을 헤집고 불쑥 떠올랐다. 마개의 봉인도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계획적 의도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를(어쩌면 나만을) 해치려는 저들의 동기는 무엇일까? 나는 원한을 살만한 주위 인물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릿속을 휘저어보아도 나 같은 선량한 인간을 해칠 사악한 인물은 걸려들지 않았다. 추리소설 같은 음모론은 맥없이 사그라졌다. 그러나 찜찜함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혹시 우리의 양심을 시험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군가가 양심 테스트를 위해 무작위로 표본 주택을 선정해 물통을 배달해 놓고 매일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물통이 문 앞에서 사라진 날, 조사원이 해당 주택을 방문해서 물통의 행방을 묻고 물통을 어떻게 처분했는가를 알아보리라는 상상이었다.
무더위에 물통과 씨름하는 나를 묵묵히 지켜보던 아내가 언제까지 물통을 문밖에 모셔둘 계획이냐며 나의 결단을 촉구했다. 나는 설령 물을 쏟아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물통을 집안에 들여놓기로 했다. 집 안에 들어온 물통은 현관 신발장 옆에서 열흘쯤 또 방치되었다. “마시지 않으려거든 쏟아버리지…”한번 ‘노우’ 하면 웬만해서는 마음을 변치 않는 아내가 중얼댔다.
“세계적으로 식수난이 얼마나 심각한데 10갤런이나 되는 음료수를 쏟아버려. 벌 받을 노릇이지.”나는 공짜 물을 마시기로 작심했다. 공짜 물을 마지못해 입에 대는 나를 아내는 말리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정한 아내는 공짜 물을 증류수 대신 증기다리미에 넣어 쓰기 시작했다. 나는 어쩌다 생각이 나면 공짜 물을 한 모금씩 마신다.
공짜 물은 이제 더 이상 공짜가 아니다. 공짜 물과 씨름하는 동안 지불한 정신적 고통, 갈등, 고민 따위를 감안하면 나는 이미 비싼 물 값을 톡톡히 치르지 않았나 싶다. 공짜에 찜찜한 느낌이 든다면 공짜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공짜라면 깜빡 죽는 사람들의 단순한 심리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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