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명암의 격정적 충돌의 산물이자 빛과 그림자의 활동사진이다. 우리가 어느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의 감독 이름은 몰라도 이미지만으로 그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영화가 무엇보다 이미지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이런 뚜렷한 시각 미와 스타일을 갖춘 촬영감독들 중에 세계 영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멕시코의 가브리엘 피게로아(1907~1997)이다. 디에고 리베라에 의해 ‘제4의 벽화가’라 불린 그는 빛과 명암의 절대적 혼합을 추구한 장인이었다. 그의 흑백 영화들을 보면 가차 없는 밝음과 어둠의 대조가 빚는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인해 보는 즉시 화면 속으로 취한 듯이 빨려들게 된다. 영화가 빛과 그림자의 마술이라는 말이 맞다.
훌륭한 촬영감독들은 마치 신이 빛을 만들어내 듯 빛을 마음대로 부릴 줄 아는 능력을 지녔는데 피게로아의 영화를 보면 빛이 그의 노리개처럼 느껴진다.
내가 현재 LA카운티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피게로아의 작품 전시회 ‘멕시코의 하늘 아래: 가브리엘 피게로아-예술과 영화’를 보면서 대뜸 느낀 바는 그의 영화가 그렉 톨랜드의 영상미를 많이 닮았다는 것이었다.
빛의 마술사였던 톨랜드는 디프 포커스의 장인으로 ‘분노의 포도’와 ‘시민 케인’ 및 ‘폭풍의 언덕’을 찍었다. 피게로아는 처음 할리웃에 와 일할 때 톨랜드 밑에서 수련을 하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후에 피게로아를 존 포드에게 소개한 사람도 톨랜드다.
이 두 사람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흑백 이미지로서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 또 다른 촬영감독이 ‘제3의 사나이’와 ‘짧은 만남’을 찍은 영국의 로버트 크래스키와 할리웃에서 활동하면서 ‘장미의 문신’과 ‘허드’를 찍은 중국계 제임스 웡 하우다. 둘 다 명암의 절묘한 배합을 구사할 줄 아는 빛의 마술사들이었다. 컬러의 장인으로는 ‘분홍신’과 ‘흑수선’을 찍은 영국의 잭 카디프가 있다. 이 밖에도 잉그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많이 찍은 스벤 니크비스트와 빌모스 지그몬드 및 네스토 알멘드로스 등도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촬영감독들이다.
전시장에는 대형 화면이 여러 개 설치돼 피게로아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데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루이스 부누엘이 감독한 ‘로스 올비다도스’도 볼 수 있다. 급격히 도시화하는 멕시코의 슬럼에 사는 10대 망나니들의 삶을 그린 영화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각박한 현실과 함께 초현실적인 꿈의 장면이 황홀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피게로아의 흑백 명암의 갈등은 작렬하는 태양 광선처럼 느껴질 정도로 치열하다. 빛이 어둠을 뚫고 들어오면서 시각을 비수로 찌르는 듯하다.
그가 할리웃에 와서 찍은 존 포드의 ‘도망자’(1947ㆍ사진)를 보면 이런 명암이 상치하면서 만들어내는 날카로우면서도 감싸 안는 듯한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헨리 폰다가 반정부 신부로 나오는 영화에는 피게로아의 영화에 많이 나온 할리웃에서도 크게 활약한 페드로 아르멘다리스와 돌로레스 델 리오가 나온다. 영화는 그래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이 원작이다.
명암의 절대적 구사자일 뿐 아니라 화면구도에 있어서도 제도사와 같은 치밀성을 보여주었던 피게로아의 이미지는 겹겹이 주름이 팬 농부나 서민의 얼굴과 혹독한 하늘 그리고 메마른 풍경 등을 부각시키면서 멕시코의 토속적이요 전통적인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그는 멕시코와 동의어다.
초현실적인 장면과 분위기를 초혼하듯이 불러내던 피게로아의 영상미가 찬란한 또 다른 영화가 ‘진주’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이 원작인 인간 탐욕에 관한 얘기로 피게로아와 함께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든 에밀리오 페르난데스가 감독했다. 진주를 캔 가난한 어부로 페드로 아르멘다리스가 나오는데 흑백 화면이 가물가물 대면서 화려하게 빛을 내고 있다.
피게로아가 할리웃에 와서 찍은 또 다른 훌륭한 영화가 둘 다 존 휴스턴이 감독한 흑백 ‘이구아나의 밤’과 컬러 ‘화산 아래서’다. 그는 또 둘 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온 전쟁영화 ‘켈리의 영웅들’과 웨스턴 ‘새라 수녀를 위한 두 마리의 나귀’도 찍었다.
1930~50년 멕시코 영화의 황금기를 이루는데 큰 기여를 한 피게로아는 생애 50여년 간 모두 200여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초기작품들 중에는 멕시코 혁명에 관한 것들이 많다. 많은 다른 흑백 영화의 장인들처럼 독일 영화계의 표현주의와 느와르의 영향을 받은 피게로아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 스타일과 예술혼이 담긴 장면들로 멕시코의 다채로운 이미지를 각인시킨 사람이었다.
내년 2월2까지 계속되는 전시회에는 그의 비디오클립과 사진, 스케치와 포스터 및 관련문서들이 선보인다. 그리고 그와 같이 동시대에 활동한 화가와 영화인들인 리베라와 세르게이 아이젠스타인의 작품도 전시된다. 한편 뮤지엄 내 빙 극장에서는 10월11일까지 피게로아의 영화들이 상영된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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