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토론토 국제영화제(TIFF-15일까지)에 다녀왔다. 토론토의 날씨는 한국의 초가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이 청명했다.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숙소인 페어몬트 로열 요크 호텔은 토론토의 아스토리아라고 불리는데 나이가 많아 방문이 마치 공포영화에서처럼 끼익하고 신음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닫힌다.
토론토영화제는 10대용 블락버스터 영화들이 판을 치는 여름이 끝나고 제대로 된 얘기에 굶주린 어른들을 위한 영화가 나오기 시작하는 가을시즌의 막을 여는 영화제다. 이때부터 시상시즌이 커튼을 열면서 무겁고 어둡고 심각하고 진지한 영화들이 대량 출하된다.
체류 나흘간 무려 13명의 스타들과 4명의 감독들을 인터뷰했는데 남들은 공짜로 영화 본다고 부러워할 줄 모르겠지만 영화 보고 인터뷰하는 상당히 고된 일정이다. 저녁마다 파티가 열려 고단함을 한 잔 술로 달랠 수 있는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배우들을 인터뷰한 영화들의 내용만 봐도 시상시즌이 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은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에이즈 환자(매튜 매코너헤이)가 멕시코로부터 약을 밀반입해 장사하는 실화인데 매코너헤이가 체중을 50파운드나 빼고 열연한다.
‘죄수들’(Prisoners)은 어린 딸을 유괴 당한 아버지(휴 잭맨)가 범죄 용의자를 납치해 온갖 고문을 자행하는 강렬한 드라마 스릴러다. 잭맨이 필사적인 연기를 해 매코너헤이와 함께 오스카 후보에 오를 기능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호남형인 휴 잭맨과의 인터뷰 때 그는 내 영어 이름이 H.J.라는 것을 보고 “너와 내 이름이 같네”라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흑인 감독 스티브 매퀸의 ‘12년간의 노예’(12 Years a Slave)는 해방된 노예가 납치돼 미 남부 농장에 팔려 노예로 12년간 일하다 자유를 찾은 실화.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데 매퀸의 역사 교과서적인 흑인판 ‘쉰들러 리스트’다. 2시간이 넘도록 영화 속 주인공처럼 모진 학대를 받는 느낌이다.
제이슨 라이트만이 감독한 ‘레이버 데이’(Labor Day)는 어린 10대 아들을 둔 심약한 홀어머니(케이트 윈슬렛)가 탈옥자(조쉬 브롤린)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안에 들여놓으면서 일어나는 3인간의 미묘한 감정을 묘사한 감각적인 드라마다. 궁극적으로 러브스토리이긴 하나 긴장감과 불안감이 가득하다.
윈슬렛은 만삭의 몸으로 인터뷰에 나왔는데 난 자꾸 그의 배에 눈이 가면서 ‘야, 저런 몸으로 인터뷰를 하다니 배우 노릇하기 쉬운 게 아니구나’ 하고 공연히 그를 동정했다. 브롤린은 내게 “나 ‘멘 인 블랙’ 홍보차 처음 한국에 갔었는데 참 좋더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브롤린은 스파이크 리가 리메이크한 ‘올드 보이’(11월 개봉)에서 최민수의 역을 한다.
론 하워드 감독의 ‘러시’(Rush)는 자동차 경주대회인 포뮬러1의 두 라이벌 드라이버 영국의 제임스 헌트(크리스 헴스워드)와 오스트리아의 니키 라우다(대니얼 브륄)의 경쟁의식을 다룬 속도감 있고 구성이 튼튼한 드라마다.
오스카 작품상 감이라는 말을 듣고 있는 이 영화에 나온 브륄은 영화제 개막작인 ‘제5의 에스테이트’(The Fifth Estate)에도 나와 뛰어난 연기를 한다. 인터뷰에서 본 브륄은 똑똑 소리가 날 것처럼 야무졌다.
빌 콘돈 감독의 ‘제5의 에스테이트’는 폭로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를 시작한 줄리안 아산지(베네딕 컴버배치)의 실화로 다소 차갑지만 상감인 준수한 영화다. 영국 TV 시리즈 ‘셜록 홈즈’에서 홈즈로 나와 인기를 모은 컴버배치는 영국 신사 같았다.
이번 가을엔 유난히 실화가 많은데 ‘보이지 않는 여인’(The Invisible Woman)도 찰스 디킨스(레이프 화인즈-감독 겸)와 그의 뮤즈이자 숨겨둔 연인 넬리(펠리시티 존스)와의 관계를 그린 실화다. 자꾸 ‘쉰들러 리스트’의 새디스트 나치 장교가 생각나는 화인즈(사진)에게 “당신은 유부남의 비밀의 사랑을 단죄할 것이냐 아니면 수용할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정열의 불길이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난 그것을 단죄할 생각이 없다”면서 “이게 네가 원하는 답이지”라며 얼굴을 붉혔다. 난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난 당신 대답이 좋다”고 응수했다. 모두들 깔깔대고 웃었다.
얼마 전 급사한 제임스 갠돌피니와 함께 50대의 두 남녀의 제2의 기회에 관한 삼삼한 코미디 드라마 ‘이너프 세드’(Enough Said)에 나온 코미디안 줄리아 루이스-드라이퍼스(52)도 만났다. 난 그에게 “당신 지금도 젊었을 때처럼 여전히 영육이 정열적이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아니 당신 지금 내게 데이트 신청하는 것이냐”며 박장대소했다. 난 “와이 낫. 아임 프리 투나잇”이라고 은근짜를 놓았더니 “오늘 저녁은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보자”고 선심을 썼다. 다음은 무슨 다음.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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