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표현대로 대갈통에 쇠똥도 안 배껴진, 그리고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내 나이 16살에 불장난처럼, 일본 가스나한테 편지를 건냈다가 보기 좋게 딱지 맞은 자식 꼴을 언짢아, 총총이 대문 밖으로 나가시면서 “채였구먼”이라고 화가 난 말을 터뜨리시던 아버지의 그 뇌임이, 두고두고 이명(耳鳴)이 되어, 내 귓전에서 울리고 있었기에 그 편지 사건 이후 나는 다시는 연애편지 같은 건 쓰지 않았다.
6.25 사변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잊혀 지지 않는 또 하나의 전쟁이 있다면 그건 우리 젊은이들이 파병되었던 1965년에서 1973년까지 치뤄진 월남전쟁일 것이다. 이 월남전쟁을 소재로 한 내가 쓴 ‘편지’란 제목의 동극이 새삼 머리에 떠오른다. 그 월남전 전쟁터에 막내아들 ‘철민’을 보낸 한 할머니를 둘러 싼 이야기! 우체부가 올 시간이면 막내가 보낸 기쁜 소식의 편지가 오지 않나 하고 사립 밖에 나가 기다리시는 할머니! 하지만 아들에게서 기쁜 소식의 편지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러한 할머니의 기다림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은 다름 아닌 한 마을에 사는 초등학생, 길남과 민호 그리고 상수였다. 오늘도 그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목에서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까닭은 그들도 할머니처럼 철민 아저씨에게서 오는 기쁜 소식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그 길목에서 우체부 아저씨를 만났다. 그리고는 오늘도 철민 아저씨에게서 온 편지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체부 아저씨가 어두운 표정으로, “있기는 있는데...” 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애들이 아저씨에게 바짝 다가가서 “어서 보여주세요!”라고 졸랐지만 우체부의 가방 속에 들어 있는 편지는 철민 아저씨가 전사(戰死)했다는 ‘전사통지서’였다. 우체부 아저씨에게서 편지의 실체를 안 아이들의 얼굴에 슬픔의 구름이 깔려가고 있었다. 그 때 길남이의 머리 속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우체부 아저씨에게 바짝 다가가서 “아저씨, 그 통지서 저에게 주세요!” 라고 소리치듯이 말했다. “왜?” 라고 묻는 우체부의 물음에 길남은 “우리가 그 통지서를 할머니에게로 가지고 가서 전사통지서가 아닌 철민 아저씨가 보낸 안부 편지인 것처럼 꾸며서 읽어 드릴려구요.” 길남의 말을 들은 우체부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내가 직접 편지를 전달하지 않는 건 직책 상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너희들이 할머니를 위해 하는 일이라서....”라며 가방 속에서 전사통지서를 꺼내어 길남이의 손에 잽혀주었다. 그러나 우체부 또한 법규를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길남과 아이들 뒤를 따라 할머니 집으로 가서 사립 밖에 서 있었다.
할머니 집에 도착한 길남이와 그의 친구들은 까막눈(글씨를 모르는)인 할머니 앞에 전사통지서를 펼쳐 놓고 아들에게서 온 기쁜 소식의 편지인 냥, 꾸며 된 편지 내용을 읽어 드렸다. 그리고 길남과 민호, 상수는 그 후로도 한 달에 한번 간격으로 그들이 쓴 가짜 편지를 철민 아저씨에게서 온 편지인 냥 우표까지 사 붙이고는 할머니에게 읽어드리곤 했다.
아이들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편지를 읽어드릴 때 마다 지긋이 눈을 감으시고는 기쁨의 눈물까지 흘리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편지 읽어 드리기는 계속 되어 갔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길남과 친구들이 또 다른 편지를 써서 할머니 집에 들려 할머니를 찾았지만 부엌에도, 집 뒷뜰 푸성기 밭에도 안 계셨다. 마지막으로 살며시 방문을 열어 보니, 할머니께서 잠자듯이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시고 계셨다. 그런데 할머니 배개 맡에 놓여 있는 반주거리 함지 속에는 막내 아들의 전사통지서와 저네들이 읽어 드린 편지들이 가지런히 담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이틀 뒤에 할머니 집 앞뜰에서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그 자리에는 길남과 친구들, 우체부 아저씨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길남이 조사를 읽었다.
‘할머니 미안해요. 우리들이 할머니를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나쁜 뜻에서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우리가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 철민 아저씨가 손수 써서 보낸 편지 인냥 여기시고, 기쁨의 눈물까지 흘리시는 할머니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예요. 하지만 할머니, 지금부터는 더 이상 철민 아저씨의 편지나 막내아드님이 전쟁터에서 돌아오기를 사립 밖에 나가 기다리시지 않으셔도 되었잖아요. 할머니, 편히 가세요! 하늘 나라에 가셔서 막네 아드님을 만나시어 함께 오래 오래 기다림 없는 세상을 사셔요!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할머니를 좋아했던 모든 사람과 길만이 드립니다!’ 이렇게 전쟁이 가져다 준 슬픈 동화 같은 연극은 끝났었다.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편지를 보내고 또 받았지만, 6.25 사변과 이민길에 오른 탓에 내가 받았던 그 많은 편지 가운데 내 책상 서랍에 남아 있는 편지는 불과 10여 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수필산책’ 송고(送稿)나 연락을 돕고 있는 N군의 e-mail을 통해 나에게 전해져 오는 기계편지는 나날이 쌓여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손편지는 기계편지의 양적공세에 밀려 주눅 들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가을에도, 그 누구에게서 보내오는 손때 묻고 까치 소리 같은 편지를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정이 담뿍 담긴 편지를 써서 보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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