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닭소리에 눈을 뜬다. 창밖엔 아침 해가 아직 산 너머에 반쯤 걸려 올라오는 중이다. 침대에 그대로 누워 찬찬히 하늘로 오르는 해의 움직임을 지켜보는데, 남편이 커피를 건네준다. 곧 일어나, 닭장에서 달걀을 수거한다. 그 달걀로 만든 오믈렛을 아침으로 먹고 난 우리 부부는 뒷마당 소파에 앉아 두 시간 정도 새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다.
점심 때 쯤 옆 호수에서 생선을 낚아 와 뒷마당 화덕에 굽는다. 식사가 끝나고 우린 각각 곧 출판에 들어갈 책의 마지막 수정을 마친다. 늦은 오후가 되어, 내일이면 갖고 갈 탄자니아 여행 가방을 마저 다 싼다. 봉사기관을 통해 가서 1년 동안 집도 짓고 영어도 가르칠 예정이다. 저녁때가 되어 환송회가 준비된 옆 동네의 아들 집으로 간다. 가까운 친구들이 거의 다 와 있다. 며느리가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먹으며 한동안 못 볼 사람들과 함께 정겨운 밤을 보낸다.”몇 주 전 남편의 시력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사무실에 있는데 점심 때쯤 갑자기 물건들이 두 개씩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양 눈 각각의 시력에는 문제가 없는데 두 눈을 같이 뜨면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그래도 고개를 뒤로 젖히거나 왼쪽으로 누이면 괜찮아서, 그 자세로 운전을 하고 집에 왔다.
급하게 병원 응급실로 갔다. 의사들도 만나고 혈액검사, 캣스캔도 했지만 확실한 답이 없이 늦저녁에야 병원을 나섰다. 그런데, 다음날 MRI를 찍은 다음부터 차츰 시력이 좋아졌다. 눈 신경과 의사를 만날 땐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서 다른 검사를 해볼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또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그때 가서 다시 검사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일은 다시 생기지 않았다.
일을 겪는 동안, 잠깐이었지만 참으로 답답하고 불안했다. 의사를 기다리고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몇 시간이 너무나 길었고, 상상의 나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비관적인 쪽으로만 펼쳐졌다. 시력을 아주 잃을 걱정이 앞섰던 남편은, 시력 때문에 일을 못해 은퇴하게 되면, 사는 동안 미뤘던 희망사항들을 부지런히 실현해보리라 선언했다. 나도 덩달아 미뤘던 내 희망사항들을 구체화 해보게 되었다.
앞의 장면들은 그런 연유로 상상해 본 몇 개 시나리오 중의 하나다. 이 시나리오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가끔씩 전혀 가보지 못한 곳에서 전혀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해보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다보니 남들의 시나리오도 궁금해져서, 요즘엔 은퇴를 10년쯤 앞둔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분위기를 침체시키지 않기 위해 ‘은퇴’라는 말 보다는 ‘이담에 더 크면’ 무얼 하고 싶으냐는 말로 질문을 던져본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시나리오를 듣고 나서 어찌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로맨틱하냐며 킥킥 대는 친구들도 실은 비슷한 시나리오를 쓰더라는 것이다. 자연을 즐기고 싶어 하고, 직업을 통해 했던 평생의 일을 총정리 하고 싶어 하고, 자식들을 삶의 반경 중심에 넣고 싶어 하고, 취미를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어 하고,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도 싶어 했다.
놀라운 것은, 은퇴를 대비하여 지금부터 조금씩 준비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대학에서 비즈니스, 미술 등의 강의를 한 과목씩 듣는 친구도 많고, 이런 저럼 사회단체들을 알아보면서 관심 있는 일을 찾는 친구도 있고, 매해 뒷마당 연못 주위에 벼를 심어 가을이면 쌀 몇 공기씩 추수를 실험하는 친구도 있고, 이미 유럽에 집을 봐 둔 친구도 있었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교통사고도 당하고 건강으로 충격도 받았던 금년, 우린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이담에 더 크면’의 현실화가 얼마나 감사하고 운 좋은 일인가를 피부로 배웠다. 친구들을 통해서는, 그 현실화의 가능성을 높이는 준비를 미리 해야 하는 지혜도 배웠다. 그 현실화는 미지수 일뿐이지만, 이제 우리도 낚시를 배우고, 주말농장에서 봉사도 하고, 아들에게 잘 보이도록 노력도 하고, 아프리카도 한번쯤은 다녀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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