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샌프란시스코 도심으로 스미는 안개의 모습을 본 일이 있는가? 저녁 무렵, 트윈 픽 등성이를 넘어오는 안개 사단의 진군(進軍)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금문교의 두 첨탑이 거대한 안개의 베일에 휘감겨 구름기둥처럼 하늘을 떠가는 광경을 목도한 일이 있는가?
혹, 쏘솔리또 언덕을 폭포처럼 쏟아지는 안개비에 흠뻑 젖어본 적이 있는가?아니면, 버클리 산허리에서 샌프란시스코만으로 잠입하는 안개 띠의 서행(徐行)을 주시한 적이 있는가? 신데렐라 같이 태가 고운 이 도시는 급류처럼 빠르게, 어떤 땐 운무처럼 느리게 흐르는 안개의 강(江)속에 몸을 담근 채 깊은 꿈을 꾸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8월은 안개의 천국이다. 온 대륙이 한 여름의 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이 태평양변의 항구는 우윳빛 안개 속에 침잠(沈潛)한다. "내가 보낸 가장 추운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이었다" 라고 고백한 마크 트웨인의 푸념은 이젠 꽤 익숙한 전설이 되었다. 지금도 각처에서 몰려온 한여름 여행자들이 해질 무렵 갑작스런 냉무(冷霧)의 기습에 사시나무처럼 떨며 그의 푸념을 되뇌긴 한다.
태평양 심해에서 올라온 찬 바닷물이 더운 공기와 만나 잉태된 샌프란시스코의 안개는 비단결같이 부드러운가 하면 빙하처럼 싸늘하다. 물과 증기,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중성(二重性)이 이렇게 안개의 본질이 됐는지도 모른다. 연인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도시를 어루만지다가도 팜므파탈처럼 차디찬 입김을 냉혹하게 뿌린다.
올 여름, 나는 남도땅 강진엘 내려갔었다. 강진은 왠지 내게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새벽 안개속에서 그가 안개를 묘사한 구절을 떠올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김승옥이 소설에서 묘사한 안개는 인간들의 허무의식을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한다. 그의 안개는 인간 내부의 끈적끈적한 일탈과 욕정의 원초적 세계를 은유하고, 무진 역시 안개가 자욱해 모든 것이 불투명한 공간으로 현대인이 처한 위치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안개라는 메타포를 통해 그것의 이중성을 서울과 고향, 과거와 현재, 순수와 타락, 인간적인 후배와 속물 친구의 대비로 묘사한 듯 보인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의 안개는 무진의 여귀같은 허무나 애매한 이중성과는 다르다. 오히려 모호함을 불사르고 확연히 피어오르는 예술혼이나 활기찬 낭만의 화신처럼 보인다.
그 증좌가 안개 속에 휘감겨 하늘을 날아오르는 금문교의 자태일 것이다. 붉은 금문교각 사이로 안개의 강이 흘러오면 첨탑 위 밤하늘 별들은 오히려 더 명멸하고, 사람들은 가슴을 열고 안개와 살을 비빈 채 함께 떨고, 흐느끼고, 웃고, 노래한다. 무도회에 초대받은 선남선녀들처럼 안개에 취해 상기된 뺨을 맞대고 허공을 걷는다. 안개는 샌프란시스코의 심장에 혼을 불어넣는 생명력의 진수임에 틀림없다.
꿈꾸는 자의 설레는 가슴만이 이 도시의 안개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안개 속에서 밤을 지새 본 사람만이 마법의 성으로 빨려드는 강한 에너지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으리라. 납힐 언덕에서 보름달을 따려고 전차에서 내려본 사람만이 운무 속에서 과거와 우윳빛 미래를 함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해리 길리암이란 향토작가는 시시각각 변하는 샌프란시스코 안개를 특유의 심미안으로 묘사했다. 그는 안개를 동화처럼 읽으라고한다. 상상의 나래를 펴고 안개가 주변 풍치와의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보라고 하였다.
알카트레츠 섬 위에 솟은 안개의 성(城), 금문교에 걸린 무지개 운무의 아취, 트윈 픽 언덕을 흘러내리는 안개 폭포, 캔들 스틱 공원 쪽으로 급류처럼 흘러가는 안개의 강. 그리고 베이를 가로질러 버클리 대안으로 항진하는 안개 선단(船團).
그대가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우선 창문너머 먼발치에서 안개를 바라볼 일이다. 가장 아껴둔 시를 암송하며 음미할 일이다. 둥근 잔에 붉은 포도주를 가득 채운 채 안개가 급류의 강을 만들고, 혹은 천천히 성을 쌓는 모습을 오래 주시할 일이다. 그래도 못내 그리우면 금문교각에서 안개의 강에 발을 담그고 하늘 틈새로 명멸하는 별들을 올려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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