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이렇게 말짱하게 살아나왔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질 않아. 기내에 반입했던 여행가방까지 안고 탈출했으니 내가 아시아나 여객기 대참사의 피해자라 어디 감히 말할 수 있겠어. 피해를 입은 승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착륙을 바로 코앞에 두고 굉음을 동반한 엄청난 충격에 기체가 요동친 순간, 공포에 질린 내 머리 속은 하얗게 비어버렸고 사고 기능은 정지해버렸지. 텅 빈 뇌리에는 어느 틈에 죽음이란 놈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평생 처음 죽음과 맞서본 절박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불과 30초 동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친 듯 요동치며 질주하던 기체가 멈추자 기체는 굉음에 먹혀버렸던 승객들의 비명과 신음소리로 가득 찼고 생존을 확인한 승객들은 탈출을 위해 요동치기 시작했어. 통로는 승객들로 뒤엉켰고 뚜껑 열린 짐칸에서 가방과 소지품을 챙기는 승객들이 적잖게 눈에 잡혔다. 나도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짐칸에서 가방을 끌어내렸지. 곧 이어 탈출 명령이 떨어졌고 비상구가 열렸다.
승무원들의 재빠르고 헌신적인 활약으로 탈출에 큰 어려움은 없었어. 나는 마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배우처럼 여행가방을 바싹 쳐들고 신음하는 승객들을 애써 외면하며 지나쳤다. 비상문 옆에 서서 몸만 뛰어 내리라고 외치는 승무원의 지시를 귓등으로 흘리고 나는 여행가방을 안고 슬라이더 위에 몸을 던졌어. 땅을 밟는 순간 여행가방을 끌고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연기가 치솟는 기체는 금방 폭발해버릴 것 같았어.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오더군.
생사의 기로에서 생존은 기내 모든 승객들의 한결같은 지상 명제요, 생존 앞에 모든 승객들은 하나의 운명체였다. 그러나 생사가 갈리고 생존이 현실로 확인된 순간 타인의 생존은 이미 빛바랜 명제가 되어버렸지. 그들의 생존은 소유의 본능 앞에 가방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해버렸는지 모른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은 또한 ‘소유적 동물’ 아니냐.
아들아, 목사인 너는 ‘존재와 소유’에 대해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내 옆에는 나와 생사를 함께 한 여행가방이 있다. 그 안에는 한국의 큰 삼촌이 너희 부부와 네 딸에게 보내는 옷과 내가 구입한 선물 등이 들어있다. 이제 여행가방에는 ‘존재와 소유’라는 인류사에 던져진 영원한 화두도 들어 있다. 나는 여행가방을 그대로 자선단체에 기부할 생각이다.
지금 미주한국일보와 LA 타임스에 같이 실린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검은 연기가 치솟는 기체의 비상구를 통해 탈출한 승객들이 걸어 나오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다. 그 사진은 매스컴과 독자 및 네티즌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을 보고 두 번 놀랬다는 것이다. 엄청난 참사에 비해 큰 인명 피해 없이 승객들이 탈출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적잖은 승객들이 여행가방 등 소지품을 챙겨 여유롭게(?) 탈출했다는 점이다.
특히 왼손에 손가방을 걸치고 오른 손으로 큰 여행가방을 끌고나오는 푸른 블라우스의 여성 승객이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국적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중국 네티즌들은 그녀가 중국인일거라며 자조적이고 비난 섞인 댓글들을 달았다. 생사가 걸린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어떻게 타인의 생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이기적 행동을 할 수가 있냐는 거였다. 옹호론을 펴는 댓글들도 있었지. 그녀의 행동이 비록 비이성적일지라도 합리적인 사고가 힘든 급박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소유물을 챙겨 든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소유와 함께 말짱하게 살아났을지라도 그녀는 분명 피해자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입은 정신적 충격과 비난의 대상이 된 비이성적이며 이기적인 행동으로 인한 자괴감이 평생 그녀를 괴롭힐는지 모른다. 어느 누구도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
아들아! 문득 가방을 든 승객이 바로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사고기에 탑승했었더라면” 가상을 하고 이 글을 엮어보았다. 숨진 3명의 중국 소녀들의 명복과 부상자들의 완쾌를 빌고 모든 생존자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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