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독백은 이어진다. 사립초등학교 설립이란, 풍선 같이 부푼 희망이 한갓 허망한 꿈이 되어, 허공으로 날라 가 버린 후, 나는 또 우리 나라 최초의 ‘소녀가극단’ 창단에 도전하였다. 이 소녀가극단 발족의 아이디어 또한 ‘새들’의 일본 순회 공연 때, 구경했던 도쿄의 관광 거리인 ‘아사구사’의 고구사이개끼죠(국제극장)에서 연중무휴로 공연 되고 있는, 쇼지꾸 영화사 전속인, 18살에서 24살까지 소녀들로 구성된 쇼지꾸 소녀가극단의 뮤지칼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 63년의 제1회 일본 순회공연 때 귀국하여 사립초등학교 설립을 서둘렀듯이 나는 64년도의 2차 일본 순회공연을 끝내고 귀국 하자 마자 서울 소녀가극단을 창단했다.
그리고는 우리 나라 영화배우의 대모로 불리우던 복혜숙씨를 단장으로 영입했다. 많은 지원자 중 외모나 각선미 그리고 연기력에서 일본의 그 쇼지꾸소녀가극단 단원에 비해, 월등하게 나아 보이는 50명의 아가씨들을 선발하여 6개월 후의 시민회관 대극장 공연을 목표로 나의 새들 연습실에서의 맹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시민회관 공연이 암초에 부딛혔다. 그 암초란 바로 창립공연의 막을 올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소홀히 생각한 나의 생각 착오에서 발생한 암초였다. 막을 올릴 날짜가 임박한 시점에서 큰 기업체를 찾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기업체가 홍보비를 그다지 쓰지 않던 시기였기에 끝내 제작비 마련에 실패하고는 사립초등학교 설립이 천재지변으로 무산 된 것과와는 달리 이 서울소녀가극단은 나의 안이한 생각 탓으로 막 한번 올려 보지도 못하고 창단 5개월만에 해체란 쓴 잔을 맡았었다.
사립초등학교 설립에서 받은 상처에다 두 번째 시도인 소녀가극단의 입맛 쓴 실패는 나의 새로운 일에의 도전행위에다 찬물을 끼얹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세워지는 중학교 입시학원의 출현에다 한국영화가 사향길로 접어 들면서 아역배우의 출연 횟수의 감소로 내가 운영하는 연기학원에 발을 들여놓은 단원수의 급감으로 인해 아동극 분야의 운영 부진이 차차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시점에서 미국의 동생으로부터 날라 온 우리 가족의 미국이민 초청장! 그 초청장 봉투에 동봉된 우리 가족에 앞서 미국에 이민 가 계셨던, 어머니로 부터의 “애비야, 그 일(아동극)도 좋지만 애들 구두닦이 만들기 전에 애들데리고 빨리 오너라!” 란 편지! 여기서 나는 내가 근 20년 동안 힘겨웁게 쌓아온 아동극의 탑을 허물어 뜨리고 이민길에 올라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헴랫’의 고민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나는 죽어도 가기 싫은 이민길을 가로 막을 수 있는 대책을 찾고 있을 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대책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아동극장 건립이었다. 그래서 1974년 초부터 나는 그 일의 주무부처인 문화공보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국립아동극장 건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그해 11월 국립극장건립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하지만 이 설립안이 국회예산결산위원회에서 무참히도 부결됨으로 해서 나는 또 한번(세번째)의 좌초에 부딛히고 말았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선택은 오로지 한 길, 가족을 이끌고 미국 이민길에 오르는 길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마지막 승부수를 찾아나섰다. 그게 바로 육영수 여사와의 친분을 연결고리로한 그 분이 주관하고 있는 어린이회관 개관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전국새마을연극경연대회’를 어린이회관과 내가 이끌고 있는 학생극협회가 공동 주최하자는 나의 제의를 그분이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 행사를 후원하기로 한 내무부와 문교부가 전국 시도와 교육청에 적극 참여하도록 권장하는 공문이 시달되어 이 행사에 참여하는 중.고등학교가 결정되어 연습에 들어갔다. 그런데 ‘좋은 일에는 마가 끼이는게 일수라는 말대로, 뜻하지 않은 변수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변수란 다름아닌 청와대의 모 공보비서관이 자랑삼아, 어린이회관 주도로 새마을연극경연대회를 개최 한다는 내용을 박대통령에게 보고 한 것이 오히려 화근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비서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박대통령은 크게 화를 내며 “그렇잖아도 일부에서 새마을 운동을 관제행사라고 비방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행사를 어린이회관에서 개최하다니?!” 그날로 이 행사는중지되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한국을 떠나지 않기 위해 마지막으로 잡고 늘어지려던 마지막 끄나풀 마져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75년 10월 아동극단 새들의 제20회 공연이자, 육여사를 위해 어린이회관 개관 축하 공연으로 ‘알라딘의 요술등잔‘을 어린이회관 극장에서 공연했고 이민을 떠나던 해인 1976년 6월에는 제16회 전국아동극경연대회를 그리고 10월의 제13회 학생극(중.고등) 경연대회를 마지막으로 치른 후 한국에서 내가 남달리 일군 것도 많기는 했지만, 삼류배우가 아쉬움을 품고 무대에서 퇴장하듯 내가 계획했다가 이루지 못한 일들을 뒤돌아 보면서 그 해 12월 18일,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김포공항에서 내가 47년 세월을 살아 온 조국을 뒤로 하고 되돌아 올 기약 없는 이민길에 올랐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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