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있고 싶어 오늘 골짜기를 찾아왔다. 여기 산골짜기에 흐르는 침묵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곳에 고여 있었을까/ 새소리에 섞여 간간히 바람 소리 물소리 들리는데/ 이 태고적 고요속에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어느날 내가 훌쩍 이 세상을 떠나도/ 내가 살았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바람은 그냥 속절 없이 불겠지/ 천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천년의 바람은 불지만/ 내 뒤에 누가 오는지 그걸 몰라 나는 쬐끔 눈물이 난다.
내가 홀로 명상을 하고 싶을때 나는 언덕을 올라 산골짜기를 찾는다. 내가 사는 동네는 언덕과 언덕으로 이어져 있는데 우거진 잣나무와 키 큰 적송과 오래된 참나무 숲이 있어서 약 십분 정도만 올라가도 깊은 골짜기를 만난다. 쇼핑 센터가 있는 동네를 5분이면 갈수 있는데 이렇게 고요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 있다는게 신기하기만 하다.
이런 골짜기들이 상당수가 되지만 내가 가끔 가는 곳은 작은 벤치가 있어서 그곳에 앉아 있기만 해도 소나무 숲에서 나오는 향기가 폐에 전달되고 몸 곳곳으로 좋은 공기가 흡수되어 저절로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아침 일찍이나 이른 저녁엔 산 골짜기를 내려다 보면 사슴의 무리나 칠면조떼들, 때론 코요테의 모습도 보인다.
내가 이곳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곳에 오면 절대적인 고요함이 지배하고 이 세상에 철저히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나는 이럴때 저절로 영원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원함에 목말라 있나보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사랑, 영원한 우정,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우리들은 한번도 이 영원함을 가져보지 못했다. 아마 그래서 인간은 슬픈지도 모른다. 영원하지 못한 것은 어느날 생명이 다하면 모두 소멸되는데 그것을 가지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헛된 수고와 헛된 노력과 정력을 낭비했던가.
젊었을때 우리들은 영원한 사랑을 두고 서로 맹세하곤 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된다. 어느 노래 가사에 있듯이 그 순간만은 진실이었다고 고백할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 순간만이 진실되고 그 순간 순간을 잘 살면 된다. 인간의 수명이 이젠 백세 시대라고 해도 백년도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간다. 이렇듯 고요한 산골짜기의 정적 속에서는 백년도 천년도 어제처럼 지나갈것 같다. 내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 속에서 나는 천년의 고즈넉함을 느끼고 천년의 바람소리를 듣는다.
나는 요즘 영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하면 과감히 버리고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사실 욕심 많았던 젊은 날에 비하면 많이 버렸다. 버리고 또 버려도 아직 버릴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 징글스럽게 생각된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비운다라는 말을 많이 쓴다. 미련과 욕심과 집착을 버리면 마음이 편해지겠지만 그것은 산으로 가는 수도승의 모습일 뿐 영원함과는 거리가 있다. 내 주위에는 이제 팔십을 눈 앞에 두고도 아직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가치 있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쓸만큼 돈을 벌고도 아직 욕심 때문에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돈이란 잘 벌어서 잘 쓸때 그돈의 가치가 있다. 돈이 그냥 은행 잔고에서 부풀어지기만 할때 그 돈은 그냥 지폐일 뿐이다. 미국의 유명한 부호인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트 등은 잘 번 돈을 모두 사회에 기증해서 가치있는 일에 쓰기 때문에 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잘 나갈때 멈출수 있는 사람들은 용기있는 사람들이다. 정상에 오르면 어느땐가는 아래로 내려와야 한다. 정상을 지키려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든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때 테니스 스타였던 존 맥캔로가 정상으로 올라 가는 길도, 그것을 지키는 것도 다 어렵지만 더 어려운 일은 내려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바닥으로 떨어졌을때 이젠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고 하듯이 인생에선 바닥으로 떨어져 보아야만 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부잣집의 귀여운 막둥이로 자랄땐 아무것도 몰랐다. 가난한 사람을 만나 끼니를 걱정하게 됐을때, 그 배고픔이나 절망감이 마치 사람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자만이 인생을 논할 수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났고, 그 처절함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많은 날을 살았다. 우리 어머니는 오십 밖에 못사신 것을 생각해 보면 나는 이십 오년을 더 살았고, 한때 친했던 내 친구는 49세에 간암으로 죽었다. 그녀는 땅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죽기 얼마전 까지 땅을 사들였다.
마지막 눈을 감기전 그녀가 내게 고백한 말은 “십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자신의 막내가 스무살이 될텐데. 그때까지만 살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줄 수 있는데”였다. 그녀는 죽기 전에 한번도 관심이 없었던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이렇듯 사람들은 늘 한발자욱씩 늦는다. 사람을 사랑함에 대해서도, 용서함에 대해서도, 너그러움에 대해서도, 따뜻함에 대해서도,베품에 대해서도.
오늘 내가 앉은 숲속의 벤치에는 태고적 고요함이 머물고 그 속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바람 한점이 지나간다. 천년의 바람이, 천년의 신비함이, 영원한 시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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